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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구두를 신은 Nov 04. 2023

이수지의 <거울 속으로>, 이상의 <거울>

- 그리고 나의 <거울>에 대해

글을 쓰기 전에 나는 더 많이 웃고 말도 많고 씩씩했다. 그러나 마음은 복잡하고 엉킨 것 같았다. 글을 쓰는 동안 나는 점점 차분해지고 말수도 적어졌다. 어떤 날은 말 한마디 안 하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다. 내 옆에 있는 사람들은 좀 어두워졌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다. 이상한 일이다. 내 마음은 더 가벼우니 말이다. 


오늘 이수지의 그림책 <거울 속으로>를 보았다. 글씨가 하나도 없으니 내가 글을 쓰게 된다. 머릿속으로 페이지마다 글을 써보았다. 

 

나를 보고 놀라요

그게 정말 나일까 의심해요

괜찮은 것도 같고

바보 같기도 해요

재미있는 아이구나 생각하고


잠깐 너무 과잉되게 생각도 해요. 뭐라도 되는 것처럼 나대죠.

자아도취

그러나 한순간 거품 빠진 듯

찌그러져요

나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I'm nothing. 


나만의 노래를 부르면 어떨까

내 나름대로 춤도 추고

하지만 가끔은 나도 내가 싫어요

내 뜻대로 안 되니

현실의 나는 되고 싶은 나와 너무 달라서

나도 내가 싫어졌어요(먼저 싫다고 불만을 표시한 건 거울 속의 나였어요.)


그러다가 현실의 나가 깨져버렸어요

그러기를 바란 건 아닌데

실수해도 괜찮은데

못나도 괜찮은데

내가 나한테 너무 많은 것을 바랐나 봐요


이상한 그림책이다. 구도가 왼쪽이 거울 속의 나, 오른쪽이 현실의 나이다. 현실의 나는 거울 속의 나와 잘 지내기도 하고, 다투기도 하는데 둘 사이가 극도로 안 좋아졌을 때 그러니까 자아가 분열되었을 때 깨지는 것은 왼쪽이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오른쪽 아이(현실적 자아)가 없어졌다. 현실적 자아가 없는데 거울 속 자아가 살아있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말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깨진 거울은 이상의 시 <거울>을 생각나게 했다. 


거울 / 이상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握手)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께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이상은 띄어쓰기를 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불안한 내면을 표현했다.(이상이 그것을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의 마음속에는 그 불안이 있었고 그것이 그렇게 표현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안정된 띄어쓰기가 질서 정연한 내면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느끼는 나는 강박이 아니다. 이상의 시가 발표되었을 때 신문사에 전화를 걸어 당장 연재를 때려치우라고 흥분했던 사람들은 '질서 정연함'에 대한 강박이 있었던 게 맞고.) 이상은 이 시를 통해서 자신과 소통할 수도 없고(내 말을 못 알아들음) 자신과 화해할 수도 없는(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임) '현실의 나'의 고통을 그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울을 깨지는 않는다. '외로된 사업'(잘못된, 현실적 자아와는 다른 일)에 골몰하는 거울 속 나에 대해 '섭섭하다'라고 말할 뿐이다. 그래도 그것은 유일하게 자신과 만날 수 있는 매개체니까. 


그런 차원에서 생각하면 <거울 속으로>의 결말은 어둡고 춥다. 작가는 이 아이를 영원히 그 어둡고 추운 상황에 가둬놓을 셈인가? 이 책의 독자를 누구로 생각하고 그린 것일까? 적어도 그냥 평범한 아이는 아니다. 이 책이 누구에게 먹힐지는 감이 온다. 그건 바로 깨어진 자아를 경험한 사람이다. 그것이 아이이든, 어른이든... 그림 속 주인공이 아이인 것은 상처받은 모든 영혼은 아이처럼 연약하기 때문에 그렇다.  


이 책을 보면서 나는 나에 대해 발견하게 되었다. 모든 페이지의 아이가 다 나였다. 그러나 나라면 이 책의 순서를 바꾸겠다. 중간에 잠깐 스쳐 지나간 그림인데 거울 속 자아와 현실의 자아가 함께 춤을 추는 그림이 있다. 나는 이 책의 결말을 이 그림으로 하겠다. 가끔은 다른 춤을, 가끔은 같은 춤을 추지만 서로 강요하지 않는다. 가끔은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고 서로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너무 의식하지 않으면서 그래도 가끔은 같이 맞춰보려고 노력하면서 그렇게 살아가겠다. 그래서 나는 요즘 이 말을 자주 한다. "나는 나를 너무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나는 '내 안의 나'에게 적당히 손 내밀줄 아는 그런 나이고 싶다. 브런치에 가입하고 글을 쓰는 내내 '넌 무엇을 좋아하니?' '넌 무엇이 슬펐니?' '넌 그때 왜 그랬니?'하고 '내 마음'에게 많이 물어보았다. 그리고 촘촘히 그 마음을 읽어주었다. '내 마음'은 '나'의 관심을 받아서 좋았나 보다. 그것이 요즈음 내가 차분하면서도 마음이 가벼운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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