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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구두를 신은 Jan 19. 2024

유치환, <바위>

- 감정이 휘몰아친다면

  내 죽으면 한 개 바위가 되리라.

  아예 애련(愛憐)에 물들지 않고

  희로(喜怒)에 움직이지 않고

  비와 바람에 깎이는 대로

  억 년 비정의 함묵(緘默)에

  안으로 안으로만 채찍질하여

  드디어 생명도 망각하고

  흐르는 구름

  머언 원뢰(遠雷)

  꿈꾸어도 노래하지 않고

  두 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바위가 되리라.    


나는 정말 바위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사랑이나 연민, 기쁨이나 분노를 느끼지 않는 것은 당연히 아니다. 그러나 그것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다. 안으로 안으로 채찍질하여 그 어떤 시련에도 흔들리지 않는, 수억 년은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은 침묵(억 년 비정의 함묵)이 최고 멋져 보였다. 나는 유치환이 정말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그는 흐르는 구름을 노래하지 않았다? 아니, 그럴 리가. 맨날 노래했다. <깃발>에서 그는 얼마나 오랜 세월 '푸른 해원'을 향하여 '손수건(깃발)'을 흔들었던가. 그것은 마치 숙명과 같음을 노래했다.

그는 애련에 물들지 않았다? 그 마음에는 누구보다도 가슴 아리게 스며든 '애련'이 있었다. 아내가 아닌 사람을 사랑했다. 그래서 '한 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꽃'과 같은 연분으로 힘들어하면서도 행복해했다.(<행복>)

그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을 때는 아라비아 사막에 가고 싶어했다. '그 열렬한 고독 가운데 옷자락 나부끼고 호올로 서'있고 싶다고 했다.(<생명의 서>) 그러고 싶다고 했지 실천은 또 다른 문제였다.

 

그러니까 내가 시를 통해 파악한 시인은 두쪽으로 깨뜨려져도 소리하지 않는 강인한 남자가 아니라 맨날 애련에 물들고, 삶의 희로애락에 흔들려 잠 못 드는 사람이다. 그는 그래서 이 시를 쓴 것이다.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수십 번은 외웠던 이 시가 내 삶의 고비고비마다 힘이 되어 주었음을 고백한다. 나는 감정이 휘몰아칠 때마다 이 시를 읽었다. 힘든 일이 있을 때도 열 받았을 때도 섭섭했을 때도 읽었다. 그리고 눈물을 쓱 닦고 아무렇지 않은 듯 다른 사람을 대했다. 그러나 이제와 생각하니 너무 그랬나 싶기도 하다. 그러지 않아도 괜찮았을 텐데. 그냥 남편 품에 안겨서 울어도 괜찮았을 텐데, 엄마한테 나 안 괜찮다고 말해도 좋았을 텐데. 

그러나 이제는 익숙해져서 그게 더 편하다. 마음이 소용돌이 치는 날엔 남편보다도 엄마보다도 더 편한 이 시를 위해 건배. 그리고 결국 노스탤지어의 푸른 해원으로 떠난 유치환 시인을 위해 건배. 죄송, 술은 아니고 사이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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