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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람 구두를 신은 Aug 09. 2024

[소설] 담장 위 하얀 찔레꽃 13화

13화. 친밀과 친절

같은 조 아이들이 교실을 대충 청소하고 가버린 뒤에도 재영은 혼자 묵묵히 창틀을 닦고 있었다. 손걸레는 이미 많이 더러워져 있었다. 더러워진 손걸레를 빨러 가는 것을 본 주현은 재영을 혼자 두고 가는 것이 괜히 마음에 걸리는지 교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재영은 빨아온 걸레를 교실 뒤편에 걸어놓는 것이 아니라 창틀을 다시 닦기 시작했다. 아무도 없는 교실에서 홀로 창틀을 고집스럽게 닦는 재영의 뒷모습에는 묘하게 비장한 면이 있었다.

“오래 걸려?”

주현이 묻자 재영이가 그제야 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듯 주현을 바라보았다. 주현은 아무런 감정이 없는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눈만은 상대에 대한 관심과 과장되지 않은 애정을 담고 있었다. 쌍꺼풀이 어렴풋이 있고 눈꼬리가 보드랍게 마무리지어진 귀엽고도 총명해 보이는 눈과 마주치자 재영은 고개를 휙 돌리고 말았다. 그래놓고는 스스로 무엇인가에 토라진 마음이 되어 창문을 드르륵 열고 창틀을 닦았다. 창틀이란 아무리 깨끗이 닦는다 해도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있어 재영은 괜히 애가 닳았다.

“먼저 간다.”

주현이 무심한 듯한 말투로 그러나 실상은 절제된 친절을 담아 인사를 건네고 교실을 나선다. 재영은 한숨을 짓는다.

급식도우미가 둘이나 결석하던 날, 그날 담임선생님은 대신 봉사할 사람이 있는지 물었으나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고 선생님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잠깐의 침묵이 흐르고 나서

"정말 없을까?"

선생님이 한 번 더 물었다. 재영은 그 순간을 견디기 어려워 손을 들었었다. 공교롭게도 재영과 주현이 동시에 손을 들었다. 그날 주현은 300명이 넘는 학생들에게 돈가스를 배식해 주었고 그 옆자리에서 재영은 밥을 퍼주었다. 그때 주현은 재영에게 호감을 갖게 된 것 같았다. 일종의 동류의식? 자신이 순수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니 남들도 그럴 거라고 생각하는? 어림없다.

밤에 우는 새와 낮에 우는 새가 같이 어울릴 수 없듯 결국 서로에게 느끼는 호감 따위는 의미 없는 것이다.      

재영은 스스로 염세주의자라고 생각했다. 그늘진 마음은 그늘진 사람을 쉽게 알아보는 법. 그날 지친 담임선생님의 고단함을 견디기 어려웠을 뿐이다.      

창밖으로 주현과 성우가 나란히 걸어가는 것이 보였다. 재영에게 친절한 주현은 성우와 친밀하다. 창틀을 닦고 있는 지금도 재영은 그 사실을 가슴 아프게 새기고 있다. 주현은 곧 알게 될 것이다. 주현에게 어울리는 남자는 성우라는 것을.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다.’

재영은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없는 것은 자신감이라는 것을 안다. 영어 실력도 수학 실력도 하다못해 운동 실력도 갖추지 못했지만 무엇보다도 성우 그 애에게 있는 자신감, 그것이 없다. 언제부터였을까, 무엇 때문이었을까, 어느 순간 놓쳐버린 수학 공부처럼, 어느 순간 어려워진 영어 문법처럼 자신감이나 자존감, 미래에 대한 낙관을 모조리 놓쳐버렸다. 다만 손끝의 통증이 선명해질수록 아름답게 울리는 기타 소리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면 살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재영의 엄마는 기타를 받아 들었다. 마침 재영의 아버지가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아버지는 음식을 우적우적 씹으면서 말했다.  

“노래로 밥 먹고 살겠어? 아빠 봐, 밥 먹고 살기가 얼마나 힘든지 알아? 응? 9시가 넘었는데 지금까지 밥도 못 먹었어. 죽기 살기로 해도 될까 말까인데.”

엄마가 아버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엄마도 너만 할 때 공부가 어려워서 골머리를 앓았어...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게 행복한 거야. 밥은 이렇게 살아도 먹고 저렇게 살아도 먹을 수 있어. 그래도 너는 하고 싶은 게 있으니 얼마나 좋아. 인생 알 수 없어. 네가 성공할지도 모르잖아.”

재영은 엄마의 너스레에서 아빠와는 또 다른 자포자기의 슬픔 같은 것을 느낀다. 재영이가 노래를 부를 때면 노래가 좋다고 칭찬하지만 그 칭찬에서는 왜 그런지 희망이나 기대라기보다는 자신이 어쩌지 못하는 어떤 것을 바라보는 심정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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