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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Jul 12. 2024

분노를 잠재우는 방법

눈덩이를 굴릴지 말지는 내 선택이기에

가뜩이나 바쁜 시기였다. 매일매일 야근을 밥먹듯이 하면서도 무엇인가 일이 터질 때가 되었는데 조용한 것이 폭풍전야의 잠잠한 바다를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그래도 하루 시작을 기분이 찜찜한 채로 맞이할 수는 없었기에 스스로의 불안감을 억누르고 업무를 시작했다.


그러자마자, 호출이 떨어졌다. 갑작스레 날 부르시는 소리에 벌떡 일어나 쪼르르 달려가 테이블 앞 작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지금 시간은.. 9시 5분을 지나고 있었다. 공식적인 업무 시각에서부터 5분밖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격정적인 어조로 과장님이 업무에 대해서 지시를 하신다. 그러다 설마 설마 내가 제일 회피하고 싶은 지시가 나오지는 않을까 싶어 노심초사한 상태로 그저 묵묵히 끄덕끄덕 거리며 받아 적고 있을 때.


아뿔싸, 내가 그렇게나 피하고 싶었던 지시사항이 과장님 입에서 툭하고 떨어져 나와 내 고막을 타고 뇌를 강타했다. 그때부터는 과장님의 말씀이 귓가에 들리지도 않고, 저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분노감을 짐짓 느끼고 있었다. 


과장님의 말씀이 끝나고 자리에 앉으니 20분이 금방 지나가 있었다. 지시받은 업무를 보고하는 시각은? 당일 오후 5시였다. 난 오후 5시까지 온갖 방법을 강구해서 그에게 제시해야 한다. 아니, 그전에 내 능력밖의 일이라는 것을 금방 느끼고는 엄청난 현타가 찾아왔다. 


업무를 하는 것에 대해선 어찌어찌 넘어간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웬만한 산전수전은 겪어봤다고 자만했던 것일까. 이 업무는 정말 내 능력을 넘어섰다. 한~참을 넘어선 업무지시였다. 


그때부터 나는 사무실에서 혼자 떨어진 섬이 된 기분을 느꼈다. 내 주위에 수많은 직원들이 웃고 떠들고, 쉴 틈 없는 타자기 소리가 귓등에 때려도 고요하고 적막하기만 했다. 이제 나는 무()에서 유(有)를 창조해내야만 했다. 그것도 하루 만에 말이다. 




최대한 냉정해져 보기로 했다. 냉철한 판단이야말로 지금 제일 필요한 능력이라고 생각해서 분노는 잠시 가라앉히고 어서 대책안을 만들어내야만 했다. 


자꾸만 한숨이 새어 나왔다. 안 되는 것을 되게 하려니 머리에 쥐가 나기 시작했다. 눈을 감으면 어두컴컴했다. 그게 지금 내가 서 있는 현실 그 자체였다. 


점심을 먹는데 밥이 코로 넘어가는지, 입으로 넘어가는지 느껴지지 않았고 결국 나는 먹던 양의 1/4도 못 먹고 수저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남은 점심시간은 옥상으로 올라가 줄담배를 피워댔다. 피워도 피워도 머릿속에선 업무에 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러다, 나랑 친하게 지내시던 형님이 곁으로 다가오셨다. 내 어깨를 토닥이시며 다 괜찮다. 별일 없을 것이다. 그러니 힘내라는 위로를 건네는 바로 그 순간.


지금껏 참고 있었던 분노게이지가 굉음을 내며 폭발하고야 말았다. 가장 친한 형님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큰소리를 내지르면서 지금 담당자가 아니라고 너무 쉽게 말씀하시는 거 아니냐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그대로 자리를 비워버렸다. 


층마다 이어지는 계단실에 혼자 우두커니 서서 거친 숨만 내쉬었다. 일평생 열이 받아도 이렇게나 머리 아프게 열받아본 적이 없었던 것 같은데, 왜 하필 지금 나를 괴롭히는지 이해할 수도 없었고, 이해하기도 싫었다. 


10분간 쉬익쉬익대며 서있다 보니, 한번 폭발했던 분노게이지는 점차 수위가 낮아져 조금은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날 도와주었다. 자리로 돌아가 형님께 공식적으로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리니, 다행히도 형님은 이해하신다며 나를 더 위로해 주셨다. 그렇게 나는 또 하나의 큰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아직까지 나는 어린애였다는 것을...




그렇게 얼토당토않은 대책안들을 마련해서 과장님께 보고 드리고 과장님께서 더 높은 분들께 나와 함께 찾아가 하나하나 설명드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9시부터 5시까지의 지옥의 끝이 보이고 있었다. 


불행히도 결론이 나지는 않았다. 상대방의 확답을 못 듣고 애매한 답만 꼭 쥔 채로 우린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털썩하고 앉았다. 그때 내 옆에 계시던 분이 하루종일 텐션이 낮아져 있는 나를 걱정하시며 물었다. 


"원래 화를 잘 못 참는 편이에요? 아니면 화가 나면 어쩔 줄 모르는 편이에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화를 낼 줄은 알았어도 그 분노를 어떻게 하면 물렁물렁한 상태로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던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고개를 저으며 지금까지 그런 질문은 받아보지도, 생각해보지도 않았다고 했다. 

그분은 자신은 똑같은 상황이 닥쳐올 때마다 이까짓께 내 인생까지 송두리째 말아먹지는 않을 것이라고, 그냥 욕 한번 먹고 또 웃으면서 마주하면 어떻게든 실마리가 풀린다고 해주셨다. 


아, 역시 세상에는 여러 사람들이 존재하고 그들만의 방식을 가지고 있구나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 순간이었다. 나는 잔걱정을 줄줄이 매달고 사는 사람이라, 하나의 걱정이 눈덩이가 되어 최종적으로는 커다란 산처럼 커지게 된다면 이분은 눈덩이가 생기든 말든, 이 눈덩이가 나에게 달려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굴릴지 말지를 결정하는 주도권을 쥐고 있다는 차이점이 내 눈을 번쩍 뜨이게 해 준 것이다. 


퇴근할 때쯤 되어서야 나도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눈덩이를 굴릴지 말지는 내 주도권이다. 그렇기에 눈이 내리면 내리는구나~라고 하고, 눈덩이가 굴러가면 이 눈덩이는 내가 굴리지만 이게 산사태가 아닌 그저 눈사람을 만들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구나~라고.


깨달음은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놓칠 수 있는 틈새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앞으로는 나의 분노를 잠재울 수 있기를 바라며, 

눈 내리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눈으로 멋진 눈사람을 만들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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