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언젠가는 죽는다.
이건 비단 인간뿐이 아니라 모든 생명을 부여받은 생물체에게 해당되는 말이다.
세상에 태어난 것에 축복받아 응당 살아가야 할 일생을 보내고 나면 또다시 무(無)로 돌아간다.
많은 범주들이 존재하겠으나 인간에게만 국한하여 말하자면,
우린 스스로의 모습을 직접 두 눈으로 볼 수 없다. 물론 거울에 반사되어 투영되는 모습을 스스로라 여기며
살아가지만, 말 그대로 직접 두 눈으로 볼 순 없을 것이다. 기껏 해봤자 팔, 다리, 몸통 정도려나?
그렇기 때문에 우린 스스로가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점을 망각하고 그저 시간만 흘러가고 있다고 여기곤 한다.
살아가다 보면 남의 죽음은 많이 경험한다. 그들은 나이가 드신 지긋한 노인일 수도, 직장 내 아는 사람일 수도, 방금까지 인사했던 친구일 수도, 내 친척이나 부모님일 수도, 내 아이들일 수도 있다. 죽음은 항상 일개 개인들의 곁에 존재한다. 하지만 적어도 남의 죽음을 추모하는 자리, 즉 장례식장 같은 곳은 말 그대로 '남'이 준비한 추모공간이므로 스스로 경험하지 않는 이상 그 마음을 어루만질 수도 없거니와 그저 검은 옷을 입고 헌화를 하거나 상주에게 인사 후 장례식장 도우미가 준비해 주시는 음식만 먹고 오는 정도일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에게 죽음은 저 멀리 동떨어진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라고 치부하는 경향이 없지 않아 있는 것이다. 요즘 들어 삶과 죽음에 관한 책을 많이 읽는 중인데,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골자는 삶과 죽음은 어느 경계가 명확히 있는 것이 아니라, 숨이 쉬어지는 이 순간에도 언제든지 갈대가 흔들리듯이 왔다 갔다 할 수 있는 유동적인 세계라는 것이다.
방금 태어난 아기에게서 죽음의 냄새를 맡기란 상당히 어렵다. 아니, 갓 태어난 생명을 앞에 두고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서도 이 세상 어느 곳에서는 태어나자마자 그 작은 몸보다 크다 큰 각종 의료기기들을 달고 삶과 죽음의 줄타기를 하고 있는 여린 생명들이 분명히 존재한다. 그들은 이러한 삶을 예측하고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인가? 그것은 절대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을 이 세상에 데리고 온 부모님의 마음은 어떠할까. 그야 말 그대로 지옥 그 자체일 것이다. 생명의 잉태를 축복하고 파란만장한 생활을 고대하던 부모님의 눈앞엔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생명이 눈도 뜨지 못한 채 누워있다면, 그들은 어느 세상에도 겪어보지 못한 죄책감과 슬픔과 미안함과 눈물로 하루하루를 보낼 것이다.
이런 사례를 보면서 난 어느 순간 신은 없다고 생각했다. 주위 독실한 종교인들의 말을 빌리자면 기도가 닿지 않아서 혹은 독실함이 부족했기 때문에라는 사유로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발생할 가능성이 높고 인과관계가 명확하여 누구라도 예상할 일이었다면 독실함을 가지고 기도를 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서도, 내 기준에서는 어느 누구가 이런 지옥을 눈앞에 맞이할 거란 것은 어찌 알 수 있을까?
신은 여러 모습으로 존재하고 그들에게 기도하는 방법은 가지각색이겠다만 난 이러한 사유 때문에 신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나는 특히 같은 시간을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중에 어느 순간 시간이 멈춰버린 사람을 보자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그들의 시간은 유골함에 표시되어 그 이후로는 시간은 흘러가지 않음을 눈앞에 목도하는 순간 가끔씩은 이질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지금도 36.5도의 체온으로 들숨과 날숨을 내쉬며 머리로는 생각을 하며 실제로 행동을 하는 이 와중에도 그들은 회색빛의 재가 되어 유골함에 담겨 영면을 취하고 있음에 속이 미슥거려 잠시 벽에 기대기도 한다.
나와 같은 존재였다가 마치 다른 차원의 무엇인가로 갑자기 바뀌어버린 것처럼.
내가 만약 세상을 뜬다면, 나의 생물로서의 역할은 그 즉시 종료될 테다. 그렇다면 이후엔 무엇이 남았을까?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이 종료될 테다. 그것은 나의 생물로서의 역할을 목도한 이들에게 또다시 시련을 쥐어주는 것과 같다. 그들은 내가 숨이 끊어진 것도 가뜩이나 슬픈데 사망신고도 해야 하며, 나와 관련된 기록을 모두 말소함과 동시에 경제적으로도 관련된 모든 사항을 해지해야 한다. 이는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일과 마찬가지다.
그런 의미로 요즘 주위에서 인명사고를 듣다 보면 그저 뉴스 헤드라인으로 지나가는 것에서 더 나아가 그들의 사연을 상상하고는 한다. 그들도 한 명의 엄마, 아빠이자, 형제자매이자, 동료이자, 이웃집 사람이자, 친구이자, 사랑하는 이었으리라. 본래 생명의 시간을 모두 소비하여 자연스럽게 영면에 드는 것이 아닌 의도치 않은 사고 등으로 인해 곁을 떠나간다면 앞서 말한 것처럼 그들의 가족이나 친지, 동료들은 생명적으로의 죽음을 목도하는 것과 더불어 사회적인 역할까지 종료시켜버려야 하는 처지에 놓일 것이다.
삶과 죽음은 어찌 보면 같은 존재가 아닐까. 영화「원령공주」를 보면 사슴신이 나오는 장면이 있다. 사슴신이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새싹이 자라나서 꽃을 피웠다가 발을 떼는 순간 곧바로 죽어버린다. 즉 같은 존재가 삶과 죽음을 관장하고 있던 것인데, 나는 그 어릴 적 사슴신이 걸어가는 장면을 아주 인상 깊게 봤었다.
실로 일생도 저와 같아서 삶과 죽음은 마치 사슴신이 발걸음을 짚었다가 떼기 직전인 상황이 아닐까 하고.
그러므로 우린 지금 이 순간 삶을 살아가고 있음에, 그리고 죽음에 의연한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삶과 죽음 중 어느 하나가 특출 나게 좋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기에. 다만 앞서 말한 것처럼 죽음의 경우 생물로서의,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종료시키게 되는 절차가 더 남아있음을 알려주면서 이렇게 마무리하고자 한다.
우리, 언젠가는 바람이 되어 사라질테지만 지금 당신의 발은 이 땅을 밟고 있음을 반드시 기억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