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이상은 피하지 않겠다
정신건강의학과에서 치료를 받은 지 5년째이다.
그동안 상담을 통해 감정의 변화나 증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주로 했었다.
가끔 평소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과거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와
때로는 상처받은 5살 아이가 되기도 했었고 어떤 날은 사춘기 때의 기억으로 돌아가
가족에게 일어났던 불행한 사건과 마주한 연약하고 무기력해진 나를 만나기도 했었다.
그렇게 오랜 기간 상담을 하면서도 나는 첫 결혼 실패에 대한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상담을 받을 때면 가끔씩 내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기억이 불쑥 튀어나와 이야기가 이어졌었는데
내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 이야기만큼은 절대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인지
나는 그 일만큼은 절대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나에게 그 일은 봉인된 상자에 담겨 다락 구석에 숨겨진 것으로
버려지지도 않아 억지로 보관하면서도 절대 열어보지 않는 그런 것이었다.
남편은 봉인된 나의 상처를 다시 끄집어내어 전혼과 현재 결혼의 이혼 사유가 모두
나 때문이라고 말하며 독을 품은 말을 뱉어냈다.
내 과거에 대해서 자세히 이야기한 적도 없었는데 내가 왜 이혼을 당했는지
아주 잘 알겠다며 마치 자신이 전지전능한 신이라도 된 것 마냥 모든 불화의 원인이
'나'라는 존재라고 확신에 차서 말을 했다.
'네가 왜 이혼을 당했는지 알겠다. 잘 생각해 봐.'
당시 나는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으면서도 나에게 혼인파탄의 책임을 모두 몰아가는 남편을 보면서
정말 모든 것이 나 때문일까... 라며 나조차도 나를 의심할 정도로 무기력한 상태였다.
남편이 집을 떠나고 나는 무너져 버렸다.
애써 잊고 지내는 과거의 지옥 같은 상처까지 끄집어내어 이혼의 모든 잘못이
내가 원인이라는 말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나는 죄인이 되어 어두운 집안에
숨어서 무기력하게 생활을 했었다.
작년 가을에 병원을 찾았을 때는 꽤 오랫동안 상담이 진행되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왜 이혼 하나에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지 이유를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두 번째 결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선생님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 타이핑을 하며 조심스럽게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첫 번째 결혼에서 이혼사유는 흔하지만
내가 짧은 결혼생활 동안 경험했던 일은 꽤 폭력적이었다.
내 이야기를 모두 들은 선생님은 정말 충격을 받은 표정이었다.
그런 일이 현실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너무 놀랍다며 안타까운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그곳에서 나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것이 맞다며 충분히 이혼을 할 수밖에 없는 일이고
내 잘못이 아니니... 무거운 짐을 이제는 내려놔도 된다고 해줬다.
15년 동안 내가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이
"네 잘못이 아니야"라는 것을 그때 처음 알게 되었다.
처음으로 내 가슴 깊은 곳에서 무겁게 자리 잡은 죄의식을 내려놓게 되었다.
선생님은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동안 진료를 하면서 공황장애, 우울증 환자가 보이는 증세 외에 특이하게
다른 증세가 OO 씨에게서 보여서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오늘에서야 그 이유를 알게 되었네요. PTSD라고 요즘 방송에서 많이 이야기가 나오죠.
외상 후스트레스 장애입니다. 첫 번째 결혼생활 중에 있었던 일로 인해 증세가 생긴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 모두들 별일 아니라고 했던 일이
외상 후스트레스 장애라니... 그걸 15년 동안 봉인한 채 살아왔던 것이다.
상황을 벗어나서 그들을 더 이상 보지 않으면 괜찮을 줄 알았다.
과거니까 묻어두면 잊힐 거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상처는 치료를 하지 않고 방치하면 곪아서 더 큰 고통을 유발한다.
나는 도망치듯이 짐을 싸서 결혼생활을 마쳤다.
그들과의 관계에 대한 매듭도 없이 사실혼 관계가 끝났다는 공증을 받고 사실상 결혼생활을 종료했다.
그때 나는 어떤 것들을 해야 했을까?
지금 돌이켜 보면 나는 문제가 발생했을 때 문제가 있는 상황을 늘 피하기만 했다.
문제가 된 지점에 대해서 말 한마디 하지 못한 채 모든 상황을 정리해 버렸었다.
이럴 때 흔히 이런 말을 쓴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내가 상황을 피하는 논리에는 이 문장이 늘 함께 했지만 사실은 더 복잡한 문제에 얽힐까 봐
걱정하는 두려움이 그 밑에는 깔려 있었다.
정말 똥이 더러워서 피하는 걸까? 아니었다. 더러우면 치웠어야지..
비겁했다.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내 감정이 어떤지 설명을 했어야 했다.
사실은 피하는 내가 더 두려우면서 왜 피하는 걸로 정당화하며
최선의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다고 스스로 위안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그냥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도망을 쳤을 뿐이며
그렇다고 내 마음에서 그들을 떠나보내 내가 자유로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나에게 고통을 준 사람을 용서할 수도 없었고
그들에 대한 분노나 미움으로 가득 채운 마음을 안고 꾸역꾸역 삶을 이어가기만 했다.
상처를 가슴에 담고 살아가는 것은 평화로워 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못했다.
내가 28살이었던 그날의 사건 이후로 나의 긴 불면증이 시작되었다.
15년 전에는 수면제라는 것을 어떻게 처방받는지도 몰랐기에
매일 밤을 새웠고 그렇게 혼자 맞이하는 새벽은 늘 두려움이 엄습하는 시간이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술을 매일 마시며 잠을 자기 위해 취할 만큼 술을 마시기도 했었다.
나중에는 남편을 만나 수면제를 처방받는 방법을 알게 되었고
그 뒤로는 나는 아무리 피곤해도 수면제가 없이는 잠을 절대 잘 수가 없었다.
최근 나는 수면제를 끊었다.
수면제를 끊기 위해 정말 많은 노력을 해도 되지 않았었는데...
명상과 마음공부를 하고 나서부터 내 머릿속을 지배하던 과거의 일들에서
조금씩 자유로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수면제를 먹지 않게 되었다.
많은 댓글 중에 하나가 '빨리 이혼하고 새 삶을 멋지게 사세요'라는 글이었다.
아마 나도 주변 사람이 비슷한 일을 경험했다면 그런 말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빨리 이혼을 해 버린다고 지옥 같은 삶이 종료되는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드라마에서는 자신을 버리고 가족을 위해 살아온 여성이 결국 이혼을 한다.
드라마답게 어찌하여 건물을 위자료로 받게 되고 말도 안 되게 괜찮은 연하남이 등장하여
이혼 후의 삶이 파라다이스라도 되는 것처럼 그려내며 많은 기혼 여성의 지지를 얻었다.
위자료로 건물 한 채를 주는 경우는 인성이 정말 좋은 배우자를 만나야만이 가능하다.
댓글 중에 '위자료 많이 챙기고 얼른 이혼하세요.'라는 글을 봤는데
아마 이분은 이혼을 경험해보지 못한 분이 확실하다.
우리나라에서 위자료는 최대가 3000만 원에 불과하다.
3000만 원은 한 사람의 인생을 무너뜨린 대가 치고는 너무 적은 금액이라
나도 처음 이야기를 듣고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래서 모든 것을 포기하고 자신의 몸 하나만 빠져나오는 사람들이 많다.
이혼 소송에서 재산을 나누는 기준은 유책의 여부와는 전혀 상관이 없다.
그저 재산 축적에 대한 기여도만을 기준으로 해서 재산을 분할을 하기 때문에
유책 배우자는 사과 따위는 할 필요도 없으며 위자료로 건물 한 채를 주는 것은
미국 같은 곳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과거의 일을 떠올려 보면 나에게는 이혼 이후의 삶이 새로운 인생이라고 할 만큼
행복하지도 않았었고 특별할 것도 없었다.
그들에게서 벗어나긴 했지만 내 마음속의 상처는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때는 그 상처를 어떻게 들여다봐야 할지도 몰랐었고 정신건강의학과라는 병원을 찾아가는 것은
왠지 이상하게 느껴져 감히 병원을 갈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었다.
이혼은 빠르게 하는 것이 답이라고 이야기하지만 서류가 정리되고 서로 떨어져 산다고
모든 것이 끝난 것은 아니다.
내 마음속에서 상대에 대한 생각 모두 지워내야만이
그때야 비로소 새 삶을 시작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이제는 알게 되었다.
나는 그래서 부모님 댁에서 머물지 않고 남편과 함께 살던 아파트에서
그대로 살고 있다. 피하고 싶지 않았다.
가족들은 내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그냥 다 포기하고 부모님 댁으로 가라고 나를 종용했다.
하지만
나는 아프지만 맞서기로 했다. 다시는 내 마음속에 상처를 남기지 않을 생각이다.
최근에 경찰로부터 또 연락을 받았다.
남편이 상간녀와 자신을 따라다녔다고 나를 스토킹 및 주거침입으로 고소를 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최근 스토킹 법을 강화했다고 이야기를 들었지만
진정한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신성한 법을 이런 식으로 악용하는 비열함을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아픈 아내를 두고 외도까지 했으면서 이혼을 하려고 소송 2건, 고소 2건을 했다고 한다면
과연 판사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게 될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피의자이고 피고의 신분이다.
지난여름에 처음 고소를 당했다고 경찰에게 연락을 받았을 때 당황을 했었지만
지금은 그냥 '늘 있었던 일처럼' 담담히 전화를 받았다.
요즘은 이런 일들이 너무 익숙해져서 나에게 큰 타격을 주지 못한다.
나를 힘들게 만들어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소송을 끌고 가겠다고 변호사까지 선임해서
고소를 했겠지만 나는 아무렇지 않다.
아무리 법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이라도 스토킹 법이 불륜을 저지른 자를 보호하기 위한
법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모든 사람이 알 것이다.
만약 이런 일로 내가 처벌을 받게 된다면 이건 뉴스에 제보할 정도의 핫토픽이 되지 않을까?
지인 중에 긴 소송에 휘말려 운영하던 회사까지 접을 정도로 삶이 피폐해진 경우를
본 적이 있었다. 이런 일을 옆에서 보면서 나는 소송이라는 것이 사람을 저렇게까지 만들 정도로
힘든 것이구나라고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송사에 휘말리는 것 자체에 압박을 느끼기에 많이 두려워한다.
나도 처음에는 두려웠지만 이번 기회에 나는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생각보다 소송과 고소가 그렇게 두려운 것은 아니라는 것, 경험으로써 이 정도를 알게 된 것은
나에게는 큰 자산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지금 이 시간을 지혜롭게 잘 대처하려고 한다.
나는 지금 아프지만 예전처럼 피하지 않을 것이다.
똥이 더러우면 피하는 것이 아니라 깨끗하게 치워버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