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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Z Apr 13. 2024

'나'라는 허상

영화 <블랙 스완>

인간이 온전히 자신의 힘만으로 스스로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신화의 나르키소스가 샘물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처음 마주하고 사랑에 빠진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그렇게 물의 표면을 통해나마 자신을 확인하던 인간은, 

물이라는 매체의 본질적인 공간적 제약과 표면의 일렁임이 싫었다. 

원할 때면 언제든 평평한 표면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기를 원했고, 그러한 욕구가 거울을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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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만들어진 거울은, 

인간에게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현실에서 존재하는 모습 ‘그대로’ 보여준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현실과 가장 닮아있는 거울 속의 세상은 만질 수도, 느낄 수도 없는 허상이다. 

거울은 분명 인간에게 자신을 볼 수 있는 능력을 주었으나, 

때로는 그것이 실제와 같다는 거짓된 확신을 주기도 한다. 

나르키소스에게 거울 속의 허상은 실재하지 않음으로써 그를 파멸로 이끌었고, 

거식증 환자에게 현실의 마른 몸은 거울 속의 뚱뚱한 몸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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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물질은 빛의 형태로 거울에 반사되고, 그 빛은 사람의 망막에 맺힌다. 

빛으로 맺힌 상은, 더 이상 빛의 형태가 아닌 전기적 신호로 변환되고 

신경을 통해 최종적으로 뇌의 시각 영역에 도달하여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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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 곳에서, 한 인간이 스스로 현실이라 굳게 믿는 무엇인가가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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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물론 현실 그대로의 반영(反映)일수도, 혹은 뇌의 간섭에 의한 반영(反影)일수도 있는 것이다. 

만질 수 없는 거울 속 세상의 모든 것은 결국, 인간의 뇌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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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블랙 스완>에서 니나가 존재하는 모든 공간에는 거울이 가득하다. 

거울에 갇힌 듯 살고 있는 그녀의 뇌 깊숙한 곳에는 결핍과 그에 대한 욕망이 모습을 감추고 있다. 

그녀가 거울을 통해 보는 인물들은 그녀의 결핍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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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의 세상에는 어머니의 과한 억압과 보호. 

질투와 열등감을 불러일으키며 다그치는 단장, 

그리고 니나가 갖지 못한 것들을 무기로 니나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릴리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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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니나 자신의 모습은 여러 개로 나뉜 거울들에서, 온전치 못하고 조각나 보인다.

거울 속에 사는 인물들은 니나의 결핍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면서도, 

한편으로는 그녀의 결핍을 채워주겠다며 유혹한다. 

베스가 가진 단장과의 관계와 커리어, 그리고 릴리의 관능과 자유로움. 

니나는 그들에게서 훔쳐낸 것들로 그토록 갈망하던 흑조의 모습을 채워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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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당일 완벽하지 못한 모습으로 넘어진 백조는 불안에 휩싸인다. 

인터미션, 대기실에서 그녀는 릴리의 머리를 잡아쥐고 거울을 내려친다. 

거울은 산산이 부서지고, 그 파편들은 각자 다른 빛을 비추며 바닥에 흩어진다. 

니나는 그 중 하나를 손에 쥐고 릴리의 배를 찌르기에 이른다.

거울은 깨어지고, 마침내 그녀는 거울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허상을 만들어 낼 수 있게 된다. 

검은 털로 온 몸이 뒤덮여가는 자신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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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순간 그녀는 한 마리의 완벽한 흑조 였다.

“I was perfect.”, 

완벽하게 공연을 마친 그녀의 배에는 깨어진 허상의 흔적이 박힌 채, 피가 흥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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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진 백조가 붙잡은 손은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 누구의 손이었을까.

그 손이 안내한 길의 끝은 순결한 백조의 죽음일까, 완벽한 흑조의 탄생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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