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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야 May 23. 2023

이력서만 들고 싱가포르로 떠나다

싱가포르 맨 땅에 헤딩하기

한국에 돌아와 대학교 4학년 2학기에 복학하고 치열한 취업 시장에 뛰어들었다. 그동안 각종 자격증과 스펙을 쌓기 위해, 학교와 종로, 강남의 학원을 오가며 고군분투 한 시간들이 결실을 맺을 시간이었다. 100군데 가까이 지원하였지만 낙방을 거듭하던 중, 정규직 채용 전환 조건의 인턴으로 가까스로 대기대업에 합격하게 됐다. 하지만 긴 구직 기간 끝에 합격한 기쁨도 잠시, 회사 생활을 하며 나는 한국 사회에 맞지 않는 사람이라는 걸 더욱 깨닫게 된다.


"엉뚱, 발랄, 사차원?"

회사 인턴 기간 동안의 내 목표는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평범하게 지내는 거였다. 정규직 전환을 전제로 한 졸업 전에 하는 인턴으로, 큰 결격사유만 없으면 졸업 후 정규직으로 전환된다는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대학교 때부터 나는 특이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일단 나의 시간을 침해하는 각종 회식이나 술자리 등은 모두 피해 다니며, 자칭 '아싸'를 자처했다. 하지만 흥미가 가는 건 다 경험을 해 보고 싶어 매우 바쁜 생활을 했다. 주거 건축학과 수업, 부동산 수업, 영어 청취 동아리, 봉사단, 검도부, 중국어 학원, 피아노 학원, 벨리댄스 등 강남역 주변의 학원과 학교 캠퍼스의 단과대를 모두 누비고 다녔다. 내 공부와 취미로 너무 바빴기 때문에, 학교에 떠 도는 소문이나 주변 사람들의 신변잡기에도 관심이 없었다. 지금은 ‘개인주의’란 용어가 보편화되어 집단보다 개인의 정체성을 중요시하고, 타인의 다양성을 존중하며 함부로 간섭하지 않는 ‘개인주의’로 나를 설명할 수 있지만, 당시는 이런 단어조차 생소하였고, 나는 그들에게 그냥 특이한 애로 불렸다.  


나를 억지로 감추려 하고 억지로 바꾸려 하니, 인턴 기간 동안의 답답함은 커져만 갔다. 나에게 맞지 않는 곳에 혼자 가면을 쓰고 억지로 껴 있는 것 같았다. 내가 원하는 삶을 한국 밖에 있고 너무 간절한 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나를 몰아붙이다 보니 답답한 마음이 우울함과 무기력으로 이어졌다. 점점 내 모습을 잃어가며 적극적으로 자신을 나타내려 경쟁하는 동기들 사이에서 더욱 움츠려 들었다. 인턴 기간을 끝내고 멘토로 나의 평가를 담당하신 상사분이 나에게 ‘엉뚱, 발랄, 사차원’이라는 말씀 하셨을 때, 이곳은 내가 있을 곳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할 수 있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나의 본모습을 숨길 수는 없으니, 나를 억지로 바꿀 필요가 없는 나의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는 곳에서 살고 싶었다.


사춘기도 없이 착실히 공부만 하고 사회가 정해놓은 길을 정답이라 생각하며 열심히 따라가던 나였는데, 25살이 되어서야 나는 어떤 사람이고 무엇을 할 때 행복한 지, 나 자신을 돌아보고 알아가고 이해하는 시간을 비로소 갖게 되었다. 친구들은 취업 준비에 한창일 때, '나는 한국 사회가 답답하고 맞지 않으니 해외에 가서 살고 싶다'라고 말하면 내가 너무 철없는 어린애처럼 느껴질 거 같아 주변 친구들과도 연락을 끊고 혼자 고립된 날들을 보냈다. 어떻게든 싱가포르에 취업할 방법을 찾고 싶어, 인터넷으로 입사지원서를 내보고 헤드헌터 회사를 찾아가 보기도 했지만 모두 부정적인 결과만 있었다. 아무 경력 없이 신입이 싱가포르에 입사하는 건 힘드니 최소 2-3년 정도 경력을 쌓고 다시 시도해 보라는 얘기도 들었다. 하지만 나는 당장 오늘 하루, 그리고 내일을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미래에 이루어질지 아닐지도 모르는 목표를 위해 2-3년을 우울하게 살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이력서만 들고 무작정 싱가포르로 떠나다

무기력하고 고립된 날들이 계속됐다. 답답할 때는 대형 서점에 가서 바닥에 앉아 몇 시간씩 책을 읽으며 책으로부터 위로받고 답을 찾고 싶었다. 그때 발견한 책이 ‘너의 무대를 세계를 옮겨라’라는 책이었다. 한국 시티은행에서 근무하다 호주로 떠난 CEO스위트의 김은미 대표님의 책을 읽으며, 나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인도네시아에 사시면서 세계 각국에 사업체를 운영하고 계시는데, 해외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일하는 생활이 너무 자유롭고 재밌고 멋져 보였다.


그리고 방황하는 나에게 용기를 준 미국이 친구가 있었다. "만약 싱가포르에 가서 취업이 안되고 돌아온다 해도 그걸로도 값진 경험을 한 거니 그건 실패가 아니야" 

목표를 세우고 성공과 실패, 이 두 가지 잣대로만 평가를 하는 한국 사회에서 자란 나에게 새로운 시각을 던져주었다. 서부를 개척한 미국의 프런티어 정신 가득한 그 친구의 말에 용기를 얻은 나는 싱가포르행을 결심한다. 일단 '한국촌'이라는 싱가포르의 한인 커뮤니티를 통해 단기 하숙집을 구했다. 한국인은 싱가포르에 90일간 무비자 체류를 할 수 있어서 비자 문제는 없었다. 그 다음 싱가포르 구직 사이트에서 최대한 많은 회사에 지원을 마친 후, 무작정 캐리어에 이력서 수십 장과 인터뷰를 위한 정장을 챙겨 싱가포르로 떠났다.


하지만 막상 싱가포르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는 두려움이 밀려와 계속 눈물이 났다. '아무도 모르는 싱가포르에 지금 나 혼자 가서 내가 해낼 수 있을까? 정말 너무 무모한 선택을 하고 있는 걸까? 안전하고 편한 우리 집과 가족을 떠나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옆에 있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도움을 청하고 싶을 정도로 막막하고 무서웠고, 졸업식 전에 싱가포르로 잠깐 여행을 다녀온다고 거짓말을 한 부모님의 얼굴도 계속 떠올랐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싱가포르에 도착하자 갑자기 마음이 너무나 편안해졌다. 싱가포르의 덥고 습한 공기가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고 위로해 주는 거 같았다. 창이공항에서 차를 타고 지나가며 도로 양옆의 울창한 나무를 보니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뭔가 잘 될 거 같다는 기대와 설렘이 마음속에서 생겨났다.


창이공항에서 이어지는 도로의 울창한 나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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