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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래힘 Jun 20. 2023

평생 마음에 새길 동그라미

힘들고 지칠 때 꺼내볼 거야

바쁜 당신을 온종일 목 빠지게 기다리던 그때의 나는,

이제 현관문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라 어디에 있었든 1초 만에 침대로 달려가 미친 듯이 널뛰는 심장을 부여잡고 잠든 척을 하는 내가 되었다.


얼마 전 '삑삑 삑삑'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에 듣던 강의를 끄고 도망치기엔 한발 늦어 거실소파에서 듣던 강의를 태연하게 마저 들었다. 이미 대화도 아는 체도 없이 지낸 지 오래. 쳐다도 보지 않는 내게 다가와 왜 화가 났냐 물었다.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는 질문이었다. 우리 이렇게 지낸 지 벌써 몇 년째인데 새삼스럽다 못해 황당했다. 입까지 막혀서 대답도 못하겠는데 패드를 뺏어가며 또 몰아붙였다.


말하기 싫다고 했다. 어차피 너만 잘못, 너만 잘하면 되고, 내가 못해준 게 뭐가 있니, 넌 할 줄 아는 게 뭐니, 나한테 뭘 해줬니...

귀 닫고 네 말만 하는, 그렇게 십 년째 되풀이되는 답도 없고 출구도 없는 그놈 목소리.


인기척만 들어도 숨이 막힌다.

어디선가 음성만 들어도 머리가 울리고, 나에게 말을 걸어오면 온몸에 털이 쭈뼛선다.


그런 당신이 나에게 이유를 묻는다.

수천억 번을 얘기해 준 것 같은데 듣지 않았으면서.

또 해줘도 결국 내 탓만 할 거면서.

그렇게 꽉 닫힌 내 마음의 문을 강제로 열라고 하니 그냥 문을 없애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대로 자겠다고 들어갔더니 두발을 당겨 침대에서 끌어내린다. 아무리 내가 버텨본들 남자 힘을 버틸 리가 만무하다. 결국 다시 끌려 나와 귀를 막는다.

그렇게 시작된 너의 광기는 아이들까지 깨워놓는다. 멈출 줄 모르는 욕설, 온갖 협박, 친정모욕, 비난, 세상 모든 나쁜 말은 다 뱉어낸다.


아주 오래전 남편의 폭력으로  경찰서를 오갈 때 시어머니는 내게 '맞을만해서 맞았겠지'라는 말로 날 두 번 죽였다. 그 후로 마음에서 시댁은 비웠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그동안 도움을 요청한 적 없었다.


그리고 얼마 전 그날, 도저히 멈출 줄 모르는 발광에 이제는 끝내야겠다 생각했다. 알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도와달라고 어머니께 전활 걸었다. 아버지가 올라오셔서 말려주셨음 한다고. 죄 없이 상처받는 손녀들 좀 지켜주라고.


통화 중에도 멈추지 않고 옆에서 쏟아내는 욕설을 전화 너머로 듣고 계시면서도 애들 앞에서 싸우지 말라는 말씀이 다였고, 이혼하겠다는 내게 또 학을 떼게 만들었다. 애들 데리고 어머니댁으로 들어오라는 황당한 말씀에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저세상 멘트를 날리셨다.


아차차
그 집안은 돈 버는 아들이 상전이고 하늘이고 법이었지.


결국은 아이들을 데리고 새벽 1시가 되어 뛰쳐나왔다. 두 번 다시 되풀이하지 않으리라.

끈질긴 인연은 여기까지.

그렇게 나는 이혼소송을 준비 중이다.


남편과 사는 동안 매일이 모험이었고, 긴장이었고, 불안이었다. 많은 용기가 필요했던 매일.

이젠 그 하루를 우리 모두를 위해 용기 내보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고민 끝에 결정 한 변호사 사무실에 다녀왔다.

3개월 전 변호사 상담을 다녀오는 길에 눈물이 앞을 가려 운전하는 내내 내가 지금 차 속에 있는 건지 빗속에 있는 건지 분간도 안 가던 그때와는 달리 눈물 안 났다. 정말 '다 때가 있는 거구나' 싶었다.


그 당시 상담을 다녀와서도 여느 때와 같이 주저하다 눌러앉기를 반복했다. 도저히 용기가 안 나서.

이제는 이 집에 눌러앉으라고 깔고 뭉개도 더는 못하겠는 때가 왔다는 걸 온몸으로 느끼는 중이다.


눈물도 나지 않은 채 담담하게 계약을 마치고 아빠 사업장에 들렀다. 벽에 걸린 달에 쳐진 커다란 동그라미자세히 보아하니  안에 적힌 숫자는, 힘들게 다 키워놓고도 이렇게엉망진창으로 불효를 하리라 상상도 못 했을 내가 태어난 날. 그제야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는 걸 이 악물고 참았다.


그동안 이 악물고 버틴 날들이 지겨워 선택한 길에 는  또 다른 일들로 이 악물고 버텨야 할 것들이 천지에 깔려있다. 내 부모 마음 아플까 봐, 내 자식들 상처받을까 봐, 이제 나는 또 다른 버텨야 하는 이유들로 이를 악물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내 힘으로 펼쳐 낼 앞 날이 두렵지는 않다.


우리 아빠 달력에 'OOO생일'이라고 적힌 어제는 14년 동안 한 번도 내 남편이 챙겨준 적 없는 내 생일이었고, 역시나 올해도 당신 얼굴조차 보지 못했지만 더 이상 슬프지가 않다.


두고두고 나 힘든 날에 꺼내보면 힘이 될 이 동그라미는, 소름 끼칠 정도로 숫자를 잘 기억하고 특히나 기념일은 빠뜨린 적 없는 우리 아빠가 세월에는 장사 없다는 말을 실감하게 해 줬던 최근 몇 번의 실수로 더는 잊지 않으려 표시해 놓은 여러 마음이 담겼을 무언가다. 평생 본인의 철저함을 자부심으로 살아오신 아빠자존심일 테고, 딸 생일을 사위가 챙겨주지 않을게 뻔해 나만큼은 놓치지 말아야겠다는 조바심 모른다. 별 것도 아닌 동그라미에 너무 많은 의미를 부여해 버렸나 싶기도 하지만 달력을 사진으로 남겨두고 싶었다. 차마 그럴 용기는 나질 않아 애써 마음에 고이 담아 돌아왔다. 살다가 흔들릴 때마다 꺼내보려고.


그러고 보니 생일 딱 다음 날 변호사 선임을 했는데 그건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 됐고, 당신에게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지만 올해는 꼭 이혼이라는 선물을 받고 싶다는 염치없는 소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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