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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감자 엄마 Sep 07. 2024

폴 발레리와 여름



폴 발레리의 시 「여름 (L’Eté)」은 바다이다. 시원한 바다가 아니다. 태양빛 아래 작열하는 바다이다. 이글거린다. 꼭 올여름 같다. 찜통더위가 가시질 않던 날들. 아스팔트 열기로 도시 전체가 불가마 속에 들어앉은 것 같은 대기는 작열하는 바다 수준이었다. 그 요란한 폴 발레리의 시 「여름」이 대한민국의 폭염 속에서 비로소 공감각을 얻는 것 같다.     


여름

             프랑시스 비엘레-그리팽에게     


여름순수한 공기의 바위그리고 너뜨거운 벌집,

오 바다여무수한 파리떼 되어 흩어지네

항아리처럼 신선한 살 더미 위로 

창공이 웅웅 거리는 입 속까지. 

    

또 너불타는 집공간소중한 공간이여

고요하구나그곳에선 나무가 연기 뿜고 몇 마리 새를 잃네

그곳에선 바다의행진의물결 군단의 

덩어리 웅성거림이 끝없이 터지네.     


물 내음의 통들행복한 족속이 만드는 큰 원들

먹어대며 태양을 향해 치솟는 물굽이 위로

순수한 둥지들풀 방죽들푹 파인 파도의 그림자들아

구멍 숭숭 뚫린 잠에 홀린 아이를 흔들어다오!  

   

아이의 두 다리(신선한 한 다리는 장밋빛 다른 다리에서 

풀려나 있네), 어깨단단한 가슴

거품 이는 뺨에 섞인 한 팔은

어두운 항아리 주변에 팽개쳐져 반짝이네     


그 항아리에는 짐승들 가득 찬 엄청난 소리들이 스며드네

바다의 풍차와 한낮의 장밋빛 오두막들이 

나뭇잎 새장들과 바다의 그물코들에서 길어낸 짐승들...

아이의 온 피부는 공기의 넝쿨을 금빛으로 물들인다.   

     

폴 발레리의 여름은 강렬한 시각 이미지와 웅장한 청각 이미지들이 범람하는 바닷가이다. 생명이 가장 힘 있게 역동적으로 살아있는 시공(時空)이다. 시인은 형체를 알 수 없는 불분명한 소음의 교향악을 강렬하게 묘사한다. “그곳에선 바다의, 행진의, 또 물결 군단의 덩어리 웅성거림이 끝없이 터지네”.  한편에서는 바다의 미친듯한 파도를 시각적으로 구현한다. “오 바다여! 무수한 파리떼 되어 흩어지네, 항아리처럼 신선한 살 더미 위로 창공이 웅웅 거리는 입 속까지”


 그런 폴 발레리의 「여름」엔 ’ 잠자는 여자‘가 중심에 있다. 발레리의 여성적 자아다. ‘구멍 숭숭 뚫린 수면에 취한 어린아이(l’enfant ravie en un poreux sommeil)‘이다. 아이의 모습은 1연에서부터 5연까지 파편적으로 등장한다. 신선한 살 더미, 입, 두 다리, 어깨, 가슴, 뺨, 팔, 어두운 항아리로 은유된 몸, 그리고 피부까지 차례로 나타난다. 잠에 사로잡힌 아이는 자연과 하나이다. 노력할 필요 없이 자연과 합일의 경지에 있다. 아이의 수면은 구멍이 숭숭 뚫려 내면과 외계는 상호 교류한다.      


그러니까 폴 발레리의 시 「여름」은 여름, 바다, 인간, 이 세 가지 소재의 삼중주이다.    

  

잠든 소녀의 육신을 뒤덮는 엄청난 바다의 소리들은 5연에서 이 시의 클라이맥스를 이룬다. 소녀의 몸, 그 피부는 여름의 대기를 금빛으로 물들인다. 이는 바다와 몸의 찬가이다. 결국 폴 발레리의 여름은 정신 승리와 다름없는 몸의 찬가이다. 바다가 있기 때문에, 자연과 합일하기에 가능한 찬가이다. 바다가 없다면 여름은 고통이겠지만, 바다가 있다면 여름은 분명 찬가일 것이다. 1행에서 ‘순수한 공기의 바위’로 시작된 여름은 마지막  20행에서 ‘공기의 넝쿨’로 화(化)한다. 바다와 인간, 여름이 만드는 변형이자 연금술이다.  


대한민국의 올여름은 고통이었을까? 찬가였을까? 간단치 않다. 그저 여름이었을 뿐이다. 폭염에 휩싸인 여름이었다. 지금 선선한 바람이 아침저녁이면 불어오는 가을을 앞두고, 여름은 지나간 추억일 뿐이다. 그러나 폭염이 인간 조건이 된 시대이다. 내년의 폭염을 어떻게 대비해야 할까? 이상(異常) 폭염의 시대를 어떻게 적응해야 할까? 


인간과 바다의 합일, 인간과 자연의 합일이 주요 주제인 폴 발레리의 「여름」은 대단히 ESG(Environmental, 환경,  Social 사회, Govennance 지배구조) 적이다. 현대 사회의 기업 경영에서 지속 가능성을 달성하기 위한 핵심 요소 세 가지인 ESG는 ‘자연 친화’가 그 기반이다. 폴 발레리의 시를 ESG 찬가, ESG 수련법, ESG 교과서로 주목해야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연을 껴안고 자연과 합일해야 하기 때문이다. 내년 여름은 바다와 함께 하는 여름 세상이 되길 바란다. 인간과 자연이 합일하는 여름 세상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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