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과 외로움에 무너지지 않고 일상을 이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 바깥은 여름인데 마음은 전혀 여름일 수 없는 7개의 단편 이야기가 담겨 있다. 표지가 너무 예뻐서 혹 했는데, 첫 이야기부터 아이를 잃은 부모의 슬픔이라니 이건 반칙이다. 어떻게 그 고통을 안고 살아갈 수 있을까? 너무 시린 상실에 대한 이야기들. 부모의 죽음, 연인의 이별, 반려견의 죽음, 언어의 상실. 인생의 굴곡에서 겪는 끝없이 어어지는 상실. 그 고통을 가늠할 수도 없어서 읽는 내내 마음이 먹먹했다.
마음에 생긴 상실의 구멍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슬픔을 견딜 수 있을까?
무얼 하지 않아야 아픔을 덜어낼 수 있을까?
김애란 작가님의 담담한 듯 서정적으로 슬픔을 풀어내는 필력에 감탄하고,
생애 한 번쯤 무언가를 상실하고 아파했던 기억이 떠올라
바깥은 여름인데, 나 혼자 빙하 위에 맨발로 서 있는 사람처럼 마음이 시렸던 책.
1. 입동 - 소중한 아이를 잃게 된 부부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p.18)
가끔은 사람들이 '시간'이라 부르는 뭔가가 '빨리 감기' 한 필름처럼 스쳐가는 기분이 들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한.(P.21)
2. 노찬성과 에반 - 반려견의 죽음
삼삼오오 벤치에 모인 엄마들이 육아 정보를 공유하고, 한담을 나누며, 걱정과 관심, 애정이 담긴 눈으로 자기 자식 바라보는 모습을 관찰했다. '아, 엄마들은 아이를 저렇게 보는구나' '저런 눈빛으로 대하는 구나' 흘끔거렸다. 그때마다 찬성은 이상하게 태어나 한 번도 얼굴을 보지 못한 엄마 대신 에반이 떠올랐다. (p.66)
3. 건너편 -연인과의 이별
도화 혼자 어른이 돼가는 과정을 멀찍이서 지켜보는 일이었다. 도화의 말투와 표정, 화제가 변하는 걸 , 도화의 세계가 점점 커져가는 걸, 그 확장의 힘이 자신을 밀어내는 걸 감내하는 거였다. (p.99)
4. 침묵의 미래 - 언어의 상실
언젠가 '너무 추워 신조차 살 수 없는' 행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그 별 둘레엔 마지막 언어의 꿈과 비명이 메아리쳐 겹겹의 띠를 이루고 있다고 했다. 색색의 넓적한 고리 위에 한 부족의 언어를 물감처럼 풀어 종이로 뜬 것 같은 영혼의 무늬가 새겨져 있다고. 우리가 죽으면 그 속의 황색 먼지 또는 얼음 알갱이가 된다고 했다. (p.144)
나는 나무에 그려지고 돌에 새겨지며 태어났다. 내 첫 이름은 '오해'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자기들 필요에 의해 나를 점점 '이해'로 만들었다. 나는 내 이름이었거나 내 이름의 일부였을지 모를 그 낱말을 좋아했다. 나는 복잡한 문법 안에 담긴 단순한 사랑, 단수이자 복수, 시원이자 결말, 거의 모든 것인 동시에 아무것도 아닌 노래다.(p.145)
5. 풍경의 쓸모 - 아버지라는 이름
강의를 마치고 돌아올 때 종종 버스 창문에 얼비친 내 얼굴을 바라봤다. 그럴 땐 '과거'가 지나가고 사라지는 게 아니라 차오르고 새어 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살면서 나를 지나간 사람, 내가 경험한 시간, 감내한 감정들이 지금 내 눈빛에 관여하고, 인상에 참여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결코 사라지지 않고 표정의 양식으로, 분위기의 형태로 남아 내장 깊숙한 곳에서 공기처럼 배어 나왔다.(p.173)
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면서도 가을 풍경 속에 안긴 두 사람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쩐지 두 사람이, 좋은 일은 금방 지나가고, 그런 순간은 자주 오지 않으며, 온다 해도 지나치기 십상임을 아는 사람들 같아서였다. (p.182)
6.가리는 손 - 가진 도덕이, 가져본 도덕이 그것밖에 없어서 그래.
부모도 자식에게 경외감을 느낄 수 있구나... 네 안의 어떤 것이 너를 그렇게 만드는 걸까. 그중 내가 준 것도 있을까. 만일 그게 내가 준 것도 네가 처음부터 가진 것도 아니라면 그건 어디에서 온 걸까? 아득한 기분으로 박수 친 기억이 난다. (p.196)
7.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 남편의 부재
남편을 잃기 전 나는 내가 집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잘 몰랐다. 같이 사는 사람의 기척과 섞여 의식하지 못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내가 끄는 발소리, 내가 쓰는 물소리, 내가 닫는 문 소리가 크다는 걸 알았다. 물론 그중 가장 큰 건 내 '말소리' 그리고 '생각의 소리'였다. 상대가 없어. 상대를 향해 뻗어나가지 못한 시시하고 일상적인 말들이 입가에 어색하게 맴돌았다. 두 사람만 쓰던, 두 사람이 만든 유행어, 맞장구의 패턴, 침대 속 밀담과 험담, 언제까지 계속될 것 같던 잔소리, 농담과 다독임이 온종이 집안을 떠다녔다. 유리벽에 대가리를 박고 죽은 새처럼 번번이 당신의 부재에 부딪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때야 나는 바보같이 '아, 그 사람 이제 여기 없지...'라는 사실을 처음 안 듯 깨달았다.(p.2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