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면 멈추기
매일 달리다가 몸의 회복 속도가 따라가지 못한다는 걸 여러 가지 형태로 느낀 후 이틀에 한 번씩 달린다. 그렇게 달려도 몸상태가 안 좋으면 하루를 더 미룬다. 이렇게 해야 무리 없이 달리기를 즐길 수 있다고 느낀 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날이 갑자기 추워졌다. 집에서 들리는 바람소리는 분명 들어올 틈이 없는데 어떻게든 삐집고 들어오려고 세차게 몰아쳤다 잠잠했다가 불규칙적으로 들리는데 날씨까지 흐리니까 기괴한 소리로 들린다. 특히 현관 쪽에서 ‘웅웅’ 거리는 소리는 표현할 길이 없다.
운동하러 나가기 전에는 항상 온도를 본다. 온도를 확인해야 어떤 옷을 입을지 결정하기 때문이다. 어제는 잠깐 산에 갔다 왔는데 좀 걸으면 땀이 날테니 티셔츠랑 바람막이 하나만 입고 나갔다가 추워서 혼났다. 콧물이 줄줄 흘르고 으스스했었는데 감기 걸릴까 조마조마했지만 다행히도 괜찮았다. 바로 어제 일을 생각해서 더 껴입고 나갈까 하다가 어제는 걸었고 오늘은 뛰는 거니 그냥 반팔 티셔츠에 바람막이를 입고 거기에 손 시릴까 봐 털장갑을 추가했다.
어제 추운데 좀 힘들게 걸었던 탓일까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집에서 준비운동을 하는 내내 내일로 미룰까 이런 생각을 몇 번 했다. 하지만 운동복도 다 입었고 준비 운동도 했으니 ‘일단 나가보자, 나가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하며 뛰러 나갔다.
기온은 영상인데 날이 흐리고 바람이 정말 세게 불어 추웠다. 일단 뛰기만 하면 괜찮아지니 문제는 없을 것 같고 장갑을 준비 한건 아주 잘한 일이었다. 검은 러닝화, 검은 트레이닝 바지, 짙은 회색 바람막이, 검은 마스크, 검은 모자, 검은 헤드셋을 하고 나갔는데 장갑은 아주 새파란 색에 손등에는 하얀색 자수로 사과 모양이 그려져 있었다. 손만 파라니까 왠지 손이 더 커 보이는 것 같았고 뭔가 더 잘 뛸 수 있을 것만 같은 이상한 자신감이 생겼다. 그리고 곧 스머프가 생각났다. 스머프가 파랗다는 걸 알게 된 건 스머프를 보기 시작하고 한참 후였던게 생각났다.
집에서 준비운동을 열심히 했으니 잠깐 걷다가 아주 느린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집 근처 공원에 가면 인사를 하거나 아는 체를 하진 않지만 오래전부터 매번 보는 사람들이 있다. 오늘은 전두환 닮은 할아버지랑, 다리가 아파서 걷는 연습을 하는 어린 친구, 시바견 데리고 온 아가씨, 외국인 임산부까지만 있었다. 다른 사람들은 바람이 너무 불어서 안 나왔거나 다른 시간대에 나올 것 같았다.
어제 산에 갔다가 온 게 거의 해가 떨어졌을 때쯤이니 너무 늦게 갔던 탓에 몸이 제대로 회복되지 못한 것 같았다. 한 삼 킬로미터쯤 뛸 때까지 오른쪽 무릎에 미세한 통증이 계속 됐다가 없어졌다. 다시 오른쪽 골반쪽이 아파오기 시작했는데 경미한 수준이라 무시하고 뛰었다.
내가 잘 달리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거리나 페이스 이런 것들은 아예 무시하고 스마트워치를 차고 나가긴 하지만 옷으로 덥어놓고 보지도 않는다. 그래서 몇 킬로미터를 몇 페이스로 뛰나 이런 것보다는 그냥 시간으로 뛴다. 30분 정도 뛰면 조금 아쉬운 것 같고 한 시간을 뛰기에는 무리인 것 같아 요즘에는 40분 정도 뛰는 걸로 몇 주째 진행 중이다.
달리기를 할 때는 항상 음악을 듣는데 좋아하는 음악이나 밴드들을 묶어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서 한동안 듣다가 최근에는 오래된 록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괜찮은 곡들을 선별해놓은 플레이리스트가 있어서 한동안 그것만 들었다. 거의 이백곡 가까이 들어있으니 시간이 꽤 된다. 원래 좋아했던 곡이 흘러나오면 좋고, 몰랐던 곡들을 다시 알아가는 재미도 있다. 요즘 가장 좋아하는 곡은 ‘Lynyrd Skynyrd’의 ‘Free bird’다.
“Lord, I can't change.
Won't you fly high, free bird, yeah?”
바꿀 수 없다고 얘길 하고 자유로운 새처럼 높이 날지 않을래? 하면서 이후에 정말 날을 수 있을 것만 같은 기타 소리가 나오면 저절로 발이 빨라지면서 한 시간이라도 뛸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렇게 음악 들으며 이것저것 생각하다 보면 시간이 훌쩍 간다.
오 킬로미터까지 뛰었을 때 슬슬 오른쪽 발목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무시할 만한 통증이면 그냥 가는데 점점 더 아파와서 우선 속도를 줄었다. 그리고 육 킬로미터가 됐을 때 너무 왼쪽으로만 돌아서 그런가 싶어 방향을 바꿔서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하면서 종아리에 갑자기 통증이 생겨 못 뛸 것 만 같았다. 삼십오 분이 막 지나서 이제 오분만 뛰면 되는데 그만 뛸까 싶었지만 그냥 아픈 걸 참고 뛰었다. 내가 무슨 운동선수도 아니고 이렇게 뛰어야 된다고 누구하고 약속을 한 것도 아니고 대체 왜 계속 뛰었을까. 단지, 오늘은 사십 분을 뛰는 날이란 게 나와의 약속이긴 하지만 그래도 항상 예외는 있지 않은가. 마지막 일분 남았을 때는 절뚝거리면 뛰었고 딱 사십 분이 돼서야 멈췄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들, 내가 원했던 것들, 뭐 하나도 제대로 되질 않고 지금의 인생에서 나 스스로 나와 약속하고 할 수 있는 몇 개 없는 것들 중에 달리기가 있는데 이것 조차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면 자신감이 조금 떨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종아리가 아파도 뛰었다. 얼마나 웃기고 바보 같은지.
최근에 마음에 안 드는 경우가 생겼을 때 나도 모르게 혼잣말로 짧게 욕을 내뱉은 적이 있었다. 왜 별것도 아닌 일에 내가 욕을 해야 하나 싶어 잠깐 멈칫했다. 듣는 사람도 없고 나만의 공간에서 나 혼자 그런다는 게 바보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 누가 듣지는 못해도 내가 듣는 게 아닌가. 내가 나한테 욕을 한 것이다. 그래서 이런 일 이후로는 욕을 해봤자 듣는 건 내가 들으니 이러면 안 되겠다 싶었다. 달리기도 마찬가지다. 내가 사십 분 달리기로 했으니 나와 약속을 했다. 그 약속을 지킬지, 지키지 못하는지는 나만 안다.
집에 들어와서 샤워하고 스트레칭하고 정성스럽게 종아리 마사지도 했다. 큰 부상이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지금도 걸을 때 너무 불편한 게 또 한동안 달리기를 쉬어야 하나 싶어 한숨이 나왔다. 이런 것도 욕심에서 비롯되나 싶다.
이제 약속에 예외 조항을 넣어야겠다. ‘아프면 멈추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