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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우주 Dec 23. 2023

동지팥죽을 끓이며

어제는 동지(冬至)였지요. 동지는 24절후의 스물두 번째 절기로 일 년 중에서 밤이 가장 길고, 낮이 가장 짧은 날입니다. 태양이 적도 이남 23.5도의 동지선(남회귀선), 즉 황경(黃經) 270도의 위치에 있을 때로, 양력 12월 22일~23일 무렵이지요. 그런데, 이 동지가 음력으로 어느 때 들었는지에 따라서 다른 이름으로 불리기도 합니다.


동지가 음력 동짓달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中冬至), 그믐 무렵에 들면 노동지(老冬至)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애동지 때는 아이들에게 나쁘다고 하여 팥죽을 쑤지 않고 팥시루떡을 해 먹었습니다. 또 중동지에는 떡이나 팥죽 중 하나를 해서 먹고, 노동지에는 팥죽을 쑤어서 먹었습니다. 올해는 동지가 음력 11월 10일이었으므로 애기동지였지요. 하지만 저는 팥시루떡 대신 팥죽을 쑤었습니다.



어제 저는 퇴근하여 곧장 집으로 와서, 팥을 삶고 새알심을 만들어 동지팥죽을 쑤었습니다. 친정어머니가 끓였던 것에 비하면 우스울 정도로 적은 양이었지요. 만약 친정어머니가 보았더라면, '누구 코에 붙이려고 손바닥 만한 냄비에다 팥죽을 끓이냐'라고 한마디 했을 것입니다. 친정어머니해마다 집에서 제일 큰 가마솥에 넘치게 동지팥죽을 끓여서 이웃들과 나누어 먹었지요.


저는 냄비에 팥죽을 끓이려고 양을 가늠하여 찹쌀가루를 익반죽 했습니다. 그런데 새알심을 만들고 보니, 그 양이 너무 적은 것 같았습니다. 새알심만 넣고 끓이기에는 아무래도 건더기가 모자랄 것 같아서 찹쌀도 넣었습니다. 제 고향에서는 동지팥죽을 끓일 때 팥물에 새알심만 넣고 끓이는데, 하는 수 없이 다른 지역의 방식을 끌어와 응용한 것이었지요.



제가 어렸을 때, 친정집에서는 동짓날에 팥죽을 끓이면 먼저 동지고사(冬至告祀)를 지냈습니다. 각 방과 장독대, 우물, 부엌, 헛간 등 집안 곳곳에 팥죽을 정갈하게 놓아두었다가 식구들이 모여서 먹었지요. 그리고, 팥의 붉은색이 양색(陽色)이므로 음귀를 쫓는 데 효과가 있다고 믿어 사람이 드나드는 대문과 방문 근처의 벽에 동지팥죽을 뿌렸습니다. 그때는 어느 집이나 동짓날 뿌린 동지팥죽의 흔적이 집안 곳곳에 마치 무늬처럼 오랫동안 남아 있었지요.



동짓날이 지나면 다음날부터 낮의 길이가 길어집니다. 우리 조상들은 해가 다시 길어지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여 새로운 시작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동지를 아세(亞歲) 또는 작은설이라 하여 사람들은 동지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한 살 더 먹는다고 생각했지요. 저는 어려서부터 동지팥죽을 참 좋아했습니다. 제가 동지팥죽을 욕심껏 먹고 있으면, 어른들은 새알심을 제 나이만큼만 세어서 먹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제 나이보다 새알심을 많이 먹어 버려서 곧 할머니가 될 것이라고 놀리기도 했지요.



어제 제가 이런저런 의미를 따지고 옛 기억을 떠올리며 동지팥죽을 쑨 것은 아닙니다. 제가 나이 들어가면서 친정에서 할머니와 어머니가 절기에 맞추어 해 주던 세시음식과 풍속들을 그냥 지나치기가 왠지 서운할 때도 있었지요. 그리고, 춥고 긴 동짓날 밤에 팥죽을 끓여서 가족들이 함께 맛있게 먹으면 그것만으로도 행복하지요. 또 그 행복에 더하여 혹시 모를 나쁜 기운이 사라진다면 더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저는 어제저녁에 동지팥죽을 나누어 먹는 대신 가까운 사람들이 모인 단체 톡 방에 제가 끓인 동지팥죽 사진을 올렸습니다. 사람들은 맛있겠다, 옛날 사람 같다, 나이 들었다, 사서 먹지 힘들게 끓였냐, 며느리한테는 끓이라고 하지 마라 등등 반응이 다양했지요.


[전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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