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지난주 금요일 저녁에 고향에 갔습니다. 두 달만이었지요. 지난달에는 함께 가기로 한 동생이 출발 직전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바람에 고향집에 가져가려던 것들을 택배로 부치는 것으로 끝낸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 고향 방문은 5월 4일이 아버지의 90세 생신이어서 모처럼 사 남매가 모두 모였습니다.
언젠가 아버지는 잘 살고 있는 자식들이 보기 좋아서 100살까지 살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백과 소망이 무색하게 우리들은 몇 달 사이에 쇠약해진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다음날 점심때가 되자, 가족들은 아버지가 사 주는 육회비빔밥을 먹으러 나갔습니다. 아버지는 평소에 자주 가는 식당이나 카페에 가족들과 함께 가서 맛있게 사 먹이고 당신이 계산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자식들은 계산대 앞에서 일부러 큰소리로 '아버지, 잘 먹었습니다.' 하고 세상 사람들에게 아버지의 건재함을 알려 주는 것으로 보답하지요.
5월 초의 날씨치고는 더운 날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어린이날인지도 모른 채 바깥세상이 궁금한 손주들을 앞세우고 마을로 나섰습니다. 손주들은 가는 길 양 옆에 지천으로 자라난 풀꽃과 발에 차이는 돌멩이, 작은 벌레들에 마음을 빼앗겨 발걸음이 더디었습니다. 저는 손주들을 뒤따라 가며 요양원이나 병원으로 떠난 이웃 사람들이 두고 간 빈집을 기웃거렸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 어린것들에게 관심을 갖고 격려와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마을의 어른들은 이미 저세상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어쩌다 마주치는 사람들도 반듯하게 걷는 사람이 없습니다.
어제는 3박 4일 일정의 마지막 날이라 저희 사 남매는 부모님 일손을 덜 궁리를 했습니다. 마늘종이 나오기 시작했으니 다음 주에 따서 택배로 부쳐주겠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우리들은 새벽녘에 잠깐 비가 그친 틈을 타서 마늘밭으로 갔습니다. 좀 덜 자란 것이면 어떠랴 하는 생각에 눈뜨자마자 일어나 밥을 안치고 나가서 한 시간 남짓 엎드려 마늘종을 땄습니다. 어제는 제가 정신없이 마늘종을 따느라 몰랐는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려니 등허리와 어깨가 아팠습니다. 아직까지 불편합니다.
제 아버지와 어머니는 평생 동안 논밭에 엎드려 일했습니다. 온몸에 파스를 붙이고 육신의 통증을 참아내며, 논밭에서 나는 티끌 같은 돈을 모아 자식들을 대학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논밭이 아닌 도시를 터전으로 성과를 내고 먹고사는 자식들을 성공했다고 여깁니다. 이제는 제 부모와 고향의 어른들은 다리를 절뚝이거나 보행보조기와 지팡이에 의지하여 빈집이 즐비한 골목길을 천천히 걸어 나와 마을회관에 모여 앉아 한솥밥을 먹고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고향집에 갈 때마다 마을회관에 기부할 간식과 찬거리를 따로 주문합니다. 이번에는 백설기와 바나나, 멸치를 마련하여 가져갔습니다. 어머니의 자식자랑 방법인 셈이지요.
넓은 마당에 늘어놓은 보따리들 중에서 제 것을 찾아 떠나는 자식들을 보내며 아버지와 어머니는 기어코 눈물을 보입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제 마음은 차에 싣고 오는 보따리들보다 더 무겁습니다. 언제부터인지 그렇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