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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Jul 01. 2024

어른이 채끝

[엽편소설] 납량특집 레시피

명사선은 여명에 눈을 떴다. 새벽녘마다 머리맡에 새롭게 놓여있는 붉은 봉투를 연다. 오늘 방문할 '어른이'가 사는 곳의 주소와 붉은색으로 확연한 세 글자를 확인한다.


'열등감'


나이 든 '어른이'구나. 어쩌다 여기까지 왔을까. 명사선은 미간을 찌푸렸다. 오랜만에 가장 무서운 인간적인 방어술에 선을 그으러 간다. 결국 극복을 못한 '열등감 어른이'다.


선한 사람들을 괴롭히는 이에게 납작한 종말을 선고하며 죽음을 새겨두는 명사(銘死), 선(線)은 이름이기도 하고 직책이기도 하다. 


자신의 중심을 잃지 않고, 세상을 상상하며 지어내는 눈빛을 가진 이들을 구하는 것이 명사선에게 주어진 사명이다. 그런 눈빛을 가진 사람을 방해하는 사람의 주위에 선을 긋는 일이 그의 임무다. 


가장 고약하고 고질적인 패악을 부리는 인간, '어른이'에게 선(線)을 그으러 간다. 새벽하늘을 휘돌아 날개를 편다.




한적한 시골, 커다란 전원주택, 잔디가 넓게 깔린 정원이다. 현관 앞에 매끈한 바위에 앉았다. 


어른이가 나온다. 따라가며 둥글게 그를 돌아 선을 닫아 마무리한다. 그를 읽는다. 아, 춥고 떨리는 이 공포의 순간이 얼마만인가. 그래도 주위 사람들은 그냥 두지 그랬어. 


너 혼자 네 안에서 너를 가두어 두도록 할 거야. 이미 너무나 작은 너는 살금살금 점점 더 작아지고 쪼글어들어 나의 한 끼 식사가 될 거야. 핑크빛이 풍성하고 육즙이 가득한 부드러움으로.


어디 보자, 그의 열등감 증상을 확인한다.


눈살을 찌푸렸다. 언제나 부정적으로 시작하는 하루구나.


'아, 짜증 나! 오늘 커피는 왜 이렇게 쓴 거야!' 


모닝커피를 들고 들어온 사람은 뒤로 한발 물러서며 눈치를 본다. 어깨의 작은 떨림은 공포다.


'이만큼 돈을 벌어다 주면 커피 하나 정도는 제대로 끊여야 할 것 아냐!'


작은 나무 탁자 위에 내 팽개치듯 놓이는 커피잔의 거친 소리에 명사선은 메모와 숫자를 새겨 넣었다. 


가족 무시 정도 100에 99!


일찍 출근해서 하는 일, 온라인 일기장에 하는 화풀이다. 


'인간이란 건 아무리 가르쳐도 소용없다. 머리가 나쁜 건지 왜 맨날 커피맛이 그 모양인지 이해가 안 된다. 내가 하란대로만 해도 중간은 갈 텐데 항상 나를 무시하는 그 눈빛을 견디기 힘들다. 분명 나를 무시하는 게 틀림없다....'


블로그에 비밀글을 저장한다. ID, '세젤쿨,' 세상에서 가장 쿨하고 싶은 욕망에 괴로운 거구나. 불치의 열등감, 그래 전형적이지. 아이디에 숨어 있는 비겁한 정체성, 다른 사람을 부정해야만 하는 불안, 양적으로만 집착하는 천박한 삶, 너 스스로도 알잖아. 그렇게 해서는 인정받지 못한다는 것을 말이야. 메모와 숫자!


영혼 괴사 정도 100에 95!


점심시간, 걸음걸이 주위에 둥근 선이 명확하다. 식당으로 들어가는 그를 따라 옆자리에 투명하게 앉는다. 가만히 사소한 식사톡에 귀를 기울인다.


'요샌 누구나 화장을 하잖아. 남자나 여자나 다 번쩍거리게 광을 내고 외출하는 거잖아. 그래야 보기도 좋고 말이야.'


당연히 동의할 줄 알았는데 이십 년이나 어린 후배가 말 끝나자마다 한마디 보탠다.


'요즘 누가 그래요. 보기 좋은 거에만 매달리던 때는 지났다고요. 번쩍거리지 않아도 내면의 향기가 나는 사람들이 좋죠.'


내면이란 건 결코 없는 사람으로 몰리고 있는 그의 입에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명사선은 기다린다.


'네가 어려서 모르나 본데, 번쩍번쩍해야 주목도 받고 성공도 하는 거야. 어디 한참 선배한테 말대꾸야! 모르면 잠자코 있으라고!'


명사선은 메모와 숫자를 미루고 갑자기 벌떡 일어나 나가버리는 어른이를 따라 나간다. 루틴인 커피 전문점을 지나 그대로 사무실로 올라간다. 온라인 일기장을 열고는 분노의 타이핑을 시작한다.


'요즘 젊은것들은 싸가지가 개박아지다! 어디서 말대꾸를 하는 거야! 나를 무시해도 유분수지. 지금부터 내가 너를 길들여주지. 결재하러 올 때마다 하나씩 촘촘하게 가르쳐 줄 거야. 내가 맞다고 무릎 꿇고 애걸하며 잘못을 빌 때까지! - ID, 세젤쿨'  


곧 사무실로 들어온 후배가 커피를 내민다. 단골 커피 가게를 그냥 지나치는 어른이를 보았나 보다. 흐뭇한 명사선, 그런데 아무 대꾸도 하지 않는 어른이,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 이후 그 후배와 어떤 소통도 하려 하지 않는 어른이, 명사선은 좌절한다. 메모와 숫자.


사회적 패악 및 불통 정도 100에 120!


겸손처럼 보이는 자기 비하는 비굴한 피곤함이다. 주위를 피곤하게 만들고 불통하게 한다는 걸 왜 이 어른이는 모르는 걸까. 자신의 실제 정체성을 덮으려는 아이디로 혼자 글 쓰며 감정을 배설하는 유치한 장난 때문에 삶의 시계가 더 빠르게 종말로 치닫고 있다는 것을 모르는 어른이는 명사(銘死), 선(線)의 식감 좋은 안주가 된다. 


어린이에서 어른이 채 되지 못하고 비참하게 사는 경계인, '어른이'의 소멸 절차를 시작한다. 뜨거운 여름용 스테이크, 채끝, 추르릅! 침을 삼킨다.


99+95+120=314

314/3=104.7


100이 넘으니 부정적 감정들을 모두 모아 채끝 핑크빛 식감의 정도를 높인다. 발사믹 올리브유를 넉넉히 두른다. 와인의  따뜻하고 붉은 기운으로 그 어느 때보다 녹아드는 채끝의 부드러움으로 전율한다.


너의 채끝을 명사(銘死), 선(線)에게 맡기고 본질을 살아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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