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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Aug 09. 2024

남벽 가는 길 1

[단편소설] 5-1

나와 그가 만난 곳은 지하철 역, 땅에 붙어서도 아니고 땅 위 어느 카페에서도 아니고, 한참이나 아래로 내려가 전동차 출입구가 열리는 맞은편 대리석 의자에서였다.


집에서 될 수 있는 한 멀리 떨어진 깊은 지하에서 전철이 지나가는 소리를 세상의 심장 고동으로 느끼면서 집중하며 글을 쓰는 일은 나의 낙이었다.


겨울엔 춥지 않고 여름엔 덥지 않은 곳, 봄가을의 어정쩡함도 잊을 수 있는 곳이다. 자연을 무시하고 나만을 골몰할 수 있는 그곳이 내 아지트였다.


히끼코모리 마냥 들어앉아 번역일을 하다가 세상의 속물 냄새에 진저리 날 때 갈 수 있는 가장 낮은 곳으로 스며 들어가 글을 쓴다.


You don’t belong here.

네가 있을 곳이 아냐.


악몽을 꿀 때마다 어느 방향에서 오는지도 모르는 한 마디였다. 속을 돌아 울리며 머릿속을 헤집다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소리, 그럼 난 어디로 가?


세상에 뾰족하게 꽂혀있는 나를 제대로 지탱하게 하는 건 글을 쓰는 것이었다.


가장 깊은 지하철역, 떠날 용기있다면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곳이었다. 땅 위로 날아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것만은 아니다.  


그날도 나는 블루투스 키보드를, 가지런히 모은 다리 위에 두고 스마트폰을 연결해 글을 쓰고 있었고 그는 대낮부터 술을 진탕 마시고 고개를 꺾어 차가운 타일 벽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대강 후다닥 만들어 온 커피가 두꺼운 도자기 머그잔 옆으로 흘러내려 이물스럽게 얇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술 취한 낯선 사람을 경계하면서도 글을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렸다.


어느새 그의 고개가 기울어져 내가 쓰고 있는 글을 읽고 있다는 걸 알고는 당황하며 조용히 일어났다. 같이 일어나는 그를 느끼며 살얼음 같은 공포가 밀려왔다.


순간, 내 손목을 잡은 그의 마주친 눈에서 어두운 좌절을 보았다. 한쪽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볼을 타고 내려와 바닥에 툭 떨어졌다.


"그 집착이 나를 향했으면 좋겠어. 나를 다 쏟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무작정 반말을 하는 그를 어정쩡하게 듣고 서있었다. 그에 대해 꼭 뭐라도 써야 할 것 같은 직감이 서늘한 바람으로 지나갔다.


지하철 역 바닥에 낮게 깔리던 그의 목소리가 매일매일 찔끔거리며 내 귀를 타고 들어왔다. '얼마 남지 않아서...'


그의 무엇이 얼마 남지 않은 지 모르지만 나 또한 그 얼마 남지 않음의 느낌에 대해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날 나의 주제는 집착, infatuation이었다. 7월의 후텁함이 8월의 이글거림에 타버리기 전에 글을 마치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Strong feelings can easily turn into infatuation, which can be harmful. How does this happen? When I am infatuated with someone, I find it difficult to function properly. In the morning, I'm so preoccupied that I sometimes forget to take a shower.


강력한 감정들은 쉽게 집착으로 변할 수 있지, 해로울 수도 있어. 이런 일이 어떻게 일어나는 거지? 어떤 사람에게 내가 집착하면 제대로 기능하기가 어렵다는 걸 알아. 아침이면, 너무나 그에게 빠져 있어서 어떤 때는 샤워하는 것조차 잊어버리지.


그가 여기까지 읽은 것 같았다. 한동안 글을 쓸 수 없었다. 왜 하필 내 옆에 앉아서 자신의 한 조각을 토해두고 비틀거리며 전철을 타고 가버린 거야. 잔상으로 남은 그의 뒷모습에 나는 뭔가 큰 잘못을 저지른 것 같은 죄책감이 들었다.


휘발성 흔적으로만 내 눈 안에 남은 그에게 집착하는 내가 바보 같았지만, 어느새 나는 ‘집착’이라는 글을 시작했던 그 역에 매일 출근하듯 나가고 있었다. 살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시선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던 날, 나는 너무 놀라 헛 것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그를 기대하며 매일 나왔으면서도 정작 만날 거라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은 것처럼 인사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냥 우뚝 서서 멈춰 버렸다. 그가 걸어왔다.


귀신과 맞닥뜨린 것이 분명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뒤로 멈칫 물러섰지만 더 나갈 곳이 없었다. 냉기가 스미는 차가운 타일벽에 등을 힘껏 밀며 붙어 섰다.


“간절했어요. 그 글을 읽었던 날. 남은 온전함을 그냥 쏟아보려고요. 그게 당신이었으면 합니다.”


공손한 그의 말이 내게 왔다. 나는 3개월 전에 끄적이며 시작했던 나머지 반의 글을 그날 끝마쳤다.


The person seems to draw me into his world—a world that is not rooted in reality but rather a vivid fantasy. I don't want to escape it and often find myself willingly sinking into its depths, chasing a fairy tale ending. My longing for his eyes, heart, and touch is infatuation, and it can eventually be sheer agony to my well-being. Have I passionately surrendered to it?


그 사람이 나를 그의 세상으로 끌어당기는 거 같다. - 하나의 세상, 현실에서 환영받지 못해도 어떤 생생한 판타지 같은 그런 세상으로 말이다. 탈출을 원하는 건 아냐, 그냥 그렇게 기꺼이 어떤 심연으로 꺼져 들어가는 나를 발견하게 되는 거야, 동화 같은 끝을 쫓으면서 말이지. 그의 눈을 향해, 심장으로, 그리고 그가 스쳐가는 찰나에 대한 그 갈증이 집착이야, 결국 잘 살아내려는 내게 극심한 통증이 될 수도 있어. 그저 타버릴 듯한 뜨거움으로 그 고통에 굴복하고 있었던 걸까?


둘이 나란히 서서 한 곳을 바라보는 11, 그 열한 번째 달의 다섯 번째 날, 11월 5일에 그가 내게 왔다.


내가 정한 내 삶의 끝과 삶이 억울하게 침범한 그의 끝이 서로 마주 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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