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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Jun 28. 2024

리트머스(LITMUS)

[엽편소설] 남의 이야기, 반역

위로부터 퍼져 내려오는 코발트블루를 피할 수가 없다.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세포는 하나씩 깨어날까 아니면 한 번에 동시에 일어나는 걸까. 천장과 마주 보고 있다는 걸 깨닫는 순간 이미 몸속 수천수만 개의 세포는 이미 녹초가 되어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왜 벌써 힘든지 알지 못했다. 잠은 평화로운 은둔처가 아니었다.


모든 시간은 숨긴다. 남의 시간은 폭동한다. 그리고 정리한다. 남이 무엇을 해도 그건 자연스러운 순간일 뿐이다. 원래 생명은 서로를 침범하며 산다. 산소를 잡아먹고 에너지를 충전하고 남이 마주치는 눈빛을 잡아 꾸역꾸역 살아갈 동기를 구걸한다.


남의 시간이 얼마나 남아있는지는 개의치 않는다. 남과 함께한 무수한 시간들은 서서히 밖으로 퍼져 세상의 흔적이 된다. 흔적이 잘게 부서져 홀씨처럼 날아가면 다른 시간들을 채우고 적시며 서서히 변화한다.


세상이 점이라면 얼마나 편할까. 아니, 그 점 하나의 수많은 입자는 또 하나의 세상일 거다. 애초에 그걸 알았다면 일찍이 정리할 수 있었겠지. 점의 욕심을 따라 선으로 쌓이고 점선의 탐욕을 따라 공간으로 쌓이며 더 이상 배설할 공간이 없는 곳까지 밀려왔다. 아아아악!


아, 꿈!


물속을 휘저으며 입구로부터 내려오는 코발트블루를 피하려다 꿈에서 깬다. 거칠거칠한 표면의 이끼 늪에 빠져 붉게 건너오는 산성에 타지 않으려 몸부림치다 깬다.


남이 사랑하는 레몬과 사과식초와 안티구아 에스프레소와 남이 되는 사람들이 꿈속의 황홀한 반역이 된다. 결국은 마주하게 될 것이었다. 손을 잡아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남에 대한 정리가 먼저다.


읽은 책, 입었던 옷, 신었던 신발, 들었던 가방, 노트, 연필, 지우개와 지우개 똥… 무게를 잴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집착과 구차함을 털어내야지.


비밀번호를 꺼내고 마지막 순서들을 정리하고 남과 같이한 시간들을 다독인다. 보이지 않는 것을 드디어 눈으로 발현하며 명확하고도 상쾌한 소리로 버튼이 보이기를 기다려야지.


고통, 미래까지 가려는 공포를 정리하고,

사람, 쥐고 흔드는 폭풍에서 빠져나오고,

기록, 당치도 않은 예민함을 휘발시키고,

열망, 바로 지금을 언제나 기억하고 싶다.


스위치 오프!


이제 남을 정리한다.


싱거운 알칼리와 뜨겁게 태우는 산성의 세계를 마음껏 즐기며 살아왔으니 후회는 없다. 밍밍한 물김치 같던 그 여름의 첫사랑도, 영혼을 담은 고백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 황량한 운동장도, 떠나려고만 하던 그 지루하기 짝이 없는 평생의 안식처도 남에겐 깃털 같은 가벼움이 되었다. 이런 해방의 느낌이야말로 가장 남을 정리하기 좋은 순간인 것이다.


기다리는 미래라고는 겨울이라는 완벽한 시간과 가볍게 걷게 될 오솔길이다.


눈이 오면 좋겠어. 함박눈이 아니어도 괜찮아. 삶이라는 게 어떻게 매번 풍성한 기쁨만 주는 함박눈 같을 수 있겠어. 건조하게 투둑거리며 내리는 싸락눈의 외로움에 서있기도 하고 눈물 섞여 질척하게 내리는 진눈깨비에 같이 울기도 하는 거야. 바람이 세차 뺨을 때리는 눈도 결국은 모두 감싸 안으러 오는 거라고.


아무도 기억할 수 없으면 좋겠다. 그렇게 남을 정리하고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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