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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희수공원 Jun 12. 2024

소금 크로와상 (2-2)

[초단편소설]

‘당신에게 연락하려 했지만…’


[국제발신] 스팸이었다.


기대가 갑작스럽게 무너지고 나니 허탈한 웃음이 났다. 전화번호를 알려주면서 하주가 했던 상상이 문제였다. 별일 없이 혹시나 필요할지도 모를 어떤 때를 위해 선배의 전화번호를 알아두었을 뿐일 수도 있었다. 쓸모없는 스팸 메시지가 하주를 현실로 되돌려 놓았다.


하주는 호텔 식당의 수석 컬러테라피스트다. 처음 마주하는 색의 조화와 균형으로 심리적인 만족감을 주는 음식과 그 담음새를 디자인한다.


명쾌한 녹색, 빛나는 노랑, 따뜻한 주황, 열정적인 빨강은 식욕을 자극하는 색이다. 그중에서도 하주가 좋아하는 색은 주황이다. 주황의 새콤 쌉싸름한 자몽은 생기를 되돌려 튕겨 일어나게 하는 힘이 있다.


그와 만난 건 호텔 내 식당의 수석 요리사들과의 정기 미팅에서였다. 새로 온 수석 요리사의 환영 파티 겸 새로 개발한 음식의 컬러와 분위기에 대한 스탠딩 담소가 이루어졌다.


열 명쯤 되는 요리사들 사이로 한눈에 봐도 그가 새로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색한 웃음으로 최근 개발했다는 디저트에 대해 우물쭈물 분위기를 익히고 있었다.


자신을 기억하게 하는 음식 이야기가 한창 이었다. 하주는 주황색 자몽에 대해 색깔과 그 색깔이 주는 따뜻한 황홀감에 대해 소개했다. 황홀한 자몽이 하주가 되는 순간이었다.


쫄깃한 녹차 소면, 크림색 바삭함으로 싸인 찹쌀 탕수육, 우아한 여왕의 올림머리 같은 망고 빙수, 요리사마다 소개하는 음식이 그들 자신의 이미지와 닮은 걸 보면 그 음식은 그들의 정체성이었다.


그는 자신을 숨 막히게 하는 자몽을 소개했다. 숨통을 서서히 조이면서 자신을 죽음으로 모는 그 과정을 마치 영화 장면처럼 묘사했다. 그는 죽음의 자몽이 되었다. 하주와 그의 자몽은 황홀한 죽음을 가져다줄까. 낯선 죽음이 낯익은 자몽으로부터 왔다.


죽음의 자몽, 그가 예의 바른 웃음으로 하주를 막으며 전화번호를 달라고 했다. 웃음기 하나 없이 무언가에 홀린 듯 번호를 주고 가벼운 목례 후 말없이 돌아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면서 마치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그는 죽음의 자몽이니까.


그게 일주일 전이었다. 테이블 위에 방치되다시피 하던 스마트 폰이 하주 손에 종일 들려 있었다.


이상하게도 기다림이 시작되자, 긴 기다림으로 안달했다가 깊은 기다림으로 초조했다가 일주일쯤 지나자 허탈감과 함께 시시한 집착이었다는 부끄러움이 왔다. 그런데 왜 스마트폰을 계속 들고 다니는지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것 같았다.


으슬거리는 한기에 따뜻한 자몽티를 만들었다. 주황빛으로 흘러 진한 차가 되면 한 모금에도 온몸에 행복한 온기가 돈다.


무심코 연 스마트 폰에 문자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였다.


‘소금 크로와상을 만들려고 해요. 투명한 결마다 버터를 얇게 곁들여 진한 갈색으로 구워요. 오븐에서 방금 나온 거친 껍질에 캐러멜을 살짝 바르고 그 위에 꽤 굵은 흰 소금을 얹는 거예요. 혹시 따뜻한 자몽티 좋아하세요? 거기에 곁들이면 더 행복하실 거예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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