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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

by 희수공원

'여러분의 삶에서 주어지는 모든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힘껏 즐기기 바랍니다. 단 한 번의 인생입니다, 그 기회와 함께 하는 소중한 가치와 사랑을 기꺼이 포용하기 바랍니다.'


'Cherish and enjoy every opportunity that life presents to you with all your heart. You only live once, so embrace and relish the true value and love that come with it.'

그래 단 한 번의 인생이야. 'I only live once.' 희서는 박사 학위 수여식에서 총장 연설의 한 구절을 가슴에 담았다. 내게 오는 모든 기회들을 잘 가꾸며 사랑해야지. 진부한 졸업식 상용구임에 틀림없었지만 희서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마음 깊이 들어온 말들이었다. 그 기회가 주는 가치와 사랑, 아, 얼마나 아름다운가.

야외스타디움에서 열린 졸업식에는 졸업생들의 가족뿐 아니라 지역의 사람들이 같이 와 축하해주기도 한다. 미국의 졸업식은 한국과는 다른 지역 축제 같은 행사다. 희서의 옆에는 동후가 축하해주고 있었다. 5월의 졸업식은 아름다운 생명을 세상으로 내놓는 꽃씨가 터져나가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

동후나 희서는 한국의 5월에 쉬는 날이 많아 미국에 일주일 일정으로 졸업식에 참석할 수 있는 것이 행운이라 생각했다. 새로운 시작으로 다시 삶의 이정표를 조정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잡으려는 다짐을 가슴속에 담는 희망과 설렘의 시기였다.

미국에서의 생활도, 옛날 다짐들도, 모두 희석된 그 마지막 박사 학위 증서가 희서의 과거로 남겨지고 있었다.

독한 다짐으로 첫 발을 디뎠던 미국 초입 공항에서의 한 한국 여자아이와의 작은 다툼, 시간을 쪼개 쓰며 잠을 줄여 일하며 치열하게 공부했던 그 독기, 미국으로 찾아온 준하에게 모든 삶의 방향이 돌아가며 맞춰지던 그 예기치 않았던 시간들, 이상한 성적 취향을 가진 미국 친구 때문에 더욱더 심해진 결벽증까지, 미국이 희서에게 준 것들이 차곡차곡 정리되고 있었다.

그런 정리들이 이루어지는 곳이 졸업식인 것 같았다. 그래서 학생들은 꼭 졸업식에 참가하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실제 구름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 자신을 돌봐준 분위기, 사람들, 시스템에 눈 맞추며 감사를 표시하고 악수를 하고 포옹을 하며 더 힘내며 살아갈 힘을 얻을 수 있는 그 실체를 느끼고자 하는 것이다.

동후의 기쁜 웃음, 축하를 마음껏 즐겼다. 등을 두드려주고 졸업식 가운을 바르게 여며주고 모자의 술을 이리저리 넘겨가며 희서를 챙기고 다독여 주는 동후를 보며 이상하게도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살아 계셨다면 졸업식에 초대했을까, 참석하셨을까, 졸업 가운을 잘 입었는지 살펴주셨을까.

갑자기 가족 하나 없는 희서 자신이 견뎌야 할 몫의 시련이 남아있을 것 같은 두려움으로 주먹을 꼭 쥐었다. 아버지, 잘 살고 싶어요. 시간은 사람을 처음 날 때와 같은 선하고 순수한 모습으로 결국 돌려놓는 힘이 정말 있는 것 같았다. 희서가 바라는 아버지의 모습으로 과거 시간의 색깔이 천천히 바뀌고 있었다.

미국에서의 축하 와인과 동후와의 경쾌하고 밝은 한 주 휴가는 삶의 빛이 되리라 믿었다. 졸업식에서 큰 빛줄기를 가슴에 안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한국행 비행기를 타고서야 미국을 완전히 희서 삶에서 내려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를 등지기 위해 독하게 마음먹었던 미국행은 한국행으로 바뀌며 아버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미국의 졸업식에서 깨닫게 된 건, 마지막 남은 가족이라는 진한 끈, 아버지였다.

와인을 한잔하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기내를 덮는 조용한 비행 소음이 거슬려 뒤척이고 있었다. 화장실을 가려고 눈을 뜬 희서는 잠시 당황했다. 기내에 뿌연 안개가 가득했다. 옆 자리의 동후마저 안갯속으로 빨려 들어가 있는 듯 머리 위만 안개 위에 떠 있었다. 이게 뭐지? 꿈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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