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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메일 아이디

by 희수공원 Jan 31. 2025

   "뭐든 물어봐. 다 대답해 줄게. 이메일을 모두 보여줄 수도 있어."

  

   며칠간 말을 잊은 듯 희서는 멍했다. 여느 때처럼 금요일 저녁 식사를 같이 하면서도 나흘 전의 그 이메일을 담은 노트북의 실루엣이 머릿속을 흔들거리며 떠도는 통에 속이 울렁거렸다. 왜 이메일 내용도 아니고 그 내용을 담고 있는 이메일도 아닌, 그 모든 걸 담고 있는 노트북에 휘둘리고 있는 걸까. 

  

   희서는 그간의 준하가 그 노트북을 통해 동후와 연결되고 있었다고 생각했다. 준하를 향한 문, 수혈할 때 생명의 피가 건너가는 투명한 튜브가 떠올랐다. 희서가 몸이 아팠을 때 마음이 찢어졌을 때 혼자 와인병을 끌어안고 어떻게든 죽고 싶었을 때, 아니 기어코 살 힘을 찾으려고 몸부림칠 때 동후는 준하에게 말을 했을까.

  

   희서는 이를 물고 다시 왈칵 올라오는 설움을 참았다. 조용히 자세를 흩트리지 않고 젓가락으로 밥알을 한 톨 한 톨 입에 가져가는 희서의 모습에 동후는 어쩌면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런 표정도 없는 핏기 없는 얼굴이 금방 쓰러질 것 같으면서도 허리를 곧게 펴고 조용히 신성한 의식을 치르듯 밥을 먹고 있었다. 

  

   어떤 것이든 정리가 필요했다. 희서는 곧게 앉은 바른 자세로 시작해 하나씩 시간을 되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눈에 보이는 것들, 가장 쉬운 것부터 바로 세워야겠다는 독기가 올랐다. 일주일 내내 새벽 공원을 힘껏 달리며 슬픔과 분노를 밀어내려고 애썼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었을까. 동후와 준하는 대체 어떤 사람들일까.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처음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았다. 충격적이긴 했지만 이미 희서에게까지 이렇게 이어지게 된 지난 6년이었다. 

  

   동후가 만들어 차리는 주말 저녁의 식사는 여전히 따뜻하고 건강했다. 희서가 설거지를 하고 차를 만들어 같이 마시는 티타임도 그대로였다. 다만, 소리가 사라지고 얼굴 근육의 움직임이 사라지고 마주치는 눈 빛이 없이 이리저리 허공을 헤매는 공간에 지난 6년이 무겁게 자리하고 있었다.

  

   희서는 동후의 서재로 국화차를 만들어 들어갔던 열흘쯤 전의 그 시간으로 되돌아갔다. 들어갈 때의 그 호의적이었던 따뜻한 공기가 나올 때는 당황과 충격으로 갑자기 정전이 된 듯 암흑 같았던 그 느낌에 희서는 몸서리를 쳤다. 그 노트북의 이메일을 열었던 건 어쩌면 와야 할 시간이 온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 그 이름들... 보낸 사람, 받는 사람 이준하 그리고 sisy, 씻씨, 문득 희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sisy라고?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았다. sissy, '계집애 같은 남자'라는 의미의 영어 단어를 희서가 들었거나 말한 적이 분명 있었다. 그게 언제였지? 어디서 봤더라?

  

   그제야 희서는 삼주 전쯤 받은 온라인 쪽지가 생각이 났다. 허겁지겁 노트북을 열었다. 아직 지워지진 않았겠지. 쪽지는 받은 지 한 달쯤 되어야 삭제된다. 시스템이 원래 그런지 희서가 그렇게 설정을 했는지는 생각나지 않았다. 열어보지 않은 쪽지는 내용의 일부와 뒷 쪽이 별표 처리가 된 영어 알파벳 네 자리의 아이디를 노출하고 있었다.   


   보낸 사람 sis(sisy***)

  

   단어가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 '갖은' 말입니다. 당신이 쓰는 단어는 저를…

  

   구구절절 첫 줄과 마치 희서를 공격이라도 할 것 같은 두려움을 품은 그 쪽지를 열어보지도 않고, 희서가 쓴 블로그 글을 수정하고는 잊고 있었다. 희서는 sisy의 뒤 별 세 개를 동후의 이메일을 애써 상기하며 남은 알파벳을 맞추었다. sisyphe, 씻씨프? 씻찌프? 그러다 머릿속이 뜨거워졌다. 시지프... 시지프라고? 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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