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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지의 내용

by 희수공원 Feb 01. 2025

   '준하가 아닐지도 몰라.'

  

   설령 쪽지가 준하에게서 온 거라 해도 바로 답신을 할 순 없었다. 가려진 세 개의 알파벳이 준하의 -phe가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여전히 보낸 사람을 확신할 수 없는 이 쪽지가 희서의 엉킨 삶의 실마리가 되어 뭔가 풀어줄 것만 같았다. 더듬더듬 아무것도 잡히는 게 없을 땐 그저 가만히 눈앞에 떠오르는 것에 기대 보는 것이다.

  

   냉기가 오르는 새벽 공기를 맞받으며 달리다가 작은 공원 벤치에 앉았다. 희서는 그게 어떤 내용이든 간에 준하였으면 좋겠다는 간절함이 마음 한편에 있었다. 하지만 준하가 아니라 맞춤법에나 신경 쓰며 지나간 어느 강박적인 국어학자여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면 아무런 감정 없이 쪽지를 삭제해 버리면 그만이었다. 

  

   스마트폰을 열었다. 쪽지 앞에서 희서는 두려움에 주저하고 있었다. 이게 뭐라고. 일어난 일은 벌써 일어나 희서 앞에 버티고 있는데 갑자기 삶에 비겁해져서는 그 한 발을 내밀지 못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라도 벌어지면 좋겠어. 동후를 이해하고 또 준하를 알아내는 일이면 좋겠어. 그런 안타깝고 답답한 가슴으로 시간을 조심스럽게 채워가는 중이었다. 두 주먹을 꽉 쥐었다. 긴장 팽팽한 풍선처럼 심장이 얇아진 것 같았다. 쪽지를 클릭했다.

  

   '단어가 적절한지 모르겠습니다. '갖은' 말입니다. 당신이 쓰는 단어는 저를 부정합니다. 왠지 모르겠습니다. 그와 당신이 같이 나누었던 그 시간들이 한순간을 완벽하게 가진다는 걸 의미하겠지요. 시간을 함께 가진다는 건 온갖 갖은 상상을 하게 합니다. 당신이 그에게 내뱉은 혼잣말의 색깔은 어떤 걸까요? 당신이 겪은 모든 것들이 제게는 지독한 통증으로 다가와 이제는 갖은 핑계를 다 쏟아내고 싶습니다. 갖가지 뜨거운 감정들이 혼재되어 어느 것도 제 감정으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저의 마음은 마치 벌을 받고 있는 것처럼 갖은 수모와 모욕을 참아내야 닿을 수 있는 어떤 사람을 향합니다. 그 먼 길 끝을 메어지는 가슴으로 바라만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길 끝에 당신이 있을까요?'

  

   준하. 너 맞는구나. 희서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준하밖에 없었다. 

  

   극진한 존댓말로 보낸 이 메시지가 마치 지난 6년간의 가슴 아픈 시간들을 채우는 것 같았다. 짧은 참회록을 읽는 것 같았다. 동후를 통해 희서가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계속 알고 있었다면 준하 또한 고통의 시간들을 보냈을 터였다. 갑자기 그간 참았던 눈물이 쏟아졌다. 

  

   새벽 벤치에서 다리를 가슴에 꼭 안고 소리를 꾹꾹 눌러 참으며 울고 있었다. 희서는 자신이 지나왔던 그 통증들이 그대로 준하에게 전해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동후에게 전화가 왔다. 받지는 않았지만 왠지 알 것 같았다. 항상 새벽 그 시간에 나갔다가 거의 같은 시간에 들어오는 희서가 들어오지 않자 전화를 했을 것이다. 

  

   준하의 쪽지로 희서의 마음이 정리되는 중이었다.

  

   동후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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