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 언제부터 준하 옆에 있었던 거지?'
이 질문을 동후에게 제일 먼저 하고 싶었지만 꿀꺽 삼켰다. 희서의 오랜 직감을 희서 자신도 그대로 믿고 싶지 않았다. 행여 틀릴 수도 있는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라 애써 여기고 있었다. 밖으로 내는 순간 모든 것이 기정사실이 되어 앞으로 있을 어떤 일도 모두 인정해야만 할 것 같았다.
"준하가 유럽으로 간 후 계속 둘이 연락했던 거니?"
누구라도 그렇게 시작했을 질문부터 했다. 동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했던 반응이어서 오히려 싱거웠다. 연락은 이메일로만 했는지에 대해서는 동후는 이상하리만큼 멈칫거렸다. 이메일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도 연락을 했다는 사실에 희서는 살갗에 따갑게 긁히는 상처를 입는 것 같았다.
"준하는 예민하고 감성도 풍부하고 약한 그런 녀석이지. 난 뭔가 이건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네게 있었던 일을 바로 전해주지 못했어. 준하 가는 날에 네가 에스컬레이터에서 쓰러졌던 일..."
동후가 말을 전했다면 준하는 바로 한국으로 돌아왔을 것이라고 했다. 준하가 희서를 생각하는 만큼 희서에 대한 두려움도 크게 가지고 있다고 했다. 아마도 그때 준하가 돌아왔다면 큰 죄책감에 서로를 상처 내며 황폐한 시간을 이어갔을 거라고 동후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건 사실일지도 몰랐다. 희서가 받은 상처보다 더 크게 준하에게 독설을 퍼부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같이 있는 것이 더 괴로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동후가 냉정하다고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자주 만나는 친구라도 그 뒷모습이 멀어질 때까지, 그 그림자마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며 서 있는 희서였다. 그녀를 상처 내지 못해 안달하는 것 같은 동후의 담담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비수로 날아와 꽂히는 것 같았다.
동후는 준하 때문에 희서 옆에 있었던 걸까. 희서는 그간의 따뜻했던 동후와 희서가 몰랐던 지난 6년 동안 준하와 이어지고 있던 동후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이 느껴졌다.
그럼에도 동후는 그간 희서 옆에 있었던 그 침착함과 다정함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였다. 준하가 사랑하는 사람이라서 희서도 사랑한다고 당당하게 말했던 동후였다. 그 눈빛이 기억이 나지 않아 희서는 답답하고 슬펐다.
진지한 사람은 눈빛이 다르다. 눈으로 시간을 살고 사랑하고 고백한다. 그런 고백이 가슴 깊이 들어오면 눈을 감아도 그 사람의 눈빛이 또렷이 기억난다. 준하의 눈빛은 희서를 사랑했던 그 시간 그대로 희서 마음속에 남아있었다.
하지만 같이 있자고 말했던 동후의 그때 눈빛이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준하는 멀리 있고 자기는 희서와 같이 있으니 그게 실체 아니냐며 차분히 웃던 동후였다.
그 순간 미안했던 희서의 마음마저도 연극처럼 느껴졌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랬단 말인가. 풀리지 않는 동후의 여러 표정들이 한꺼번에 몰려드는 것 같았다.
갑자기 외로움이 몰려왔다. 결국 다시 혼자로 돌아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뒤에는 이걸 견뎌내야 한다는 독한 오기가 올라왔다.
"넌 언제부터 준하 옆에 있었던 거야?
희서는 이상한 직감으로 꾹 참고 있었던 질문을 동후에게 던지고 말았다.
동후의 대답은 '대학 3학년 때'였다. 이미 희서가 그 둘을 잘 알고 있었던 때였다. 그때도 동후는 과묵하여 답답한 면이 있었다.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않았고 서로 대화라고 할 만한 순간도 가진 적이 없었다. 희서에게는 준하 곁에만 꼭 붙어있는 동후가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동후의 짧은 대답으로 다시 대학 3학년 그 독서 토론 동아리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거기서부터 다시 똑같은 과거가 되풀이되진 않겠지 하며 희서는 몸서리를 쳤다.
그때 이후 희서의 인생에는 여러 개의 변곡점이 있었다. 미국에서의 준하, 한국에서의 준하, 준하와 보내던 날, 이별, 생명이 허무하게 지나가던 핏기 없던 희서의 몸과 마음, 희서는 어떻게 해도 잊을 수 없는 준하를 마음에 들여놓고 혼자 위로하며 지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