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하, 이 쪽지를 내가 읽으면 너인 줄 바로 알아볼 거라는 거 너도 이미 알고 있었을 거야. 동후로부터 네가 한국에 돌아왔다는 소식 들었어. 며칠 전에는 동후에게 몇 가지 질문도 했어. 아마 이미 동후에게 들었을지도 모르겠어. 동후는 아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네 상황과 소식을 전했어. 그간의 따뜻함이 사무적인 보고로 변한듯해서 당황했지만 뭔가 단단히 결심한 듯 보여서 더 이상 물어보진 않았어. 너와 동후의 관계는 여전히 내게 짙은 안개로 남아있긴 해. 동후는 그냥 네가 이 세상에 함께 있으면 되는 모양이야. 내겐 바보처럼 보였지만 그런 류의 우정이든 사랑이든 나는 담담히 지켜보겠어. 말이 길어졌네. 우리 셋이 만나기 전에 너랑 둘이 먼저 만났으면 해. 답신 기다릴게.'
희서는 준하에게 온 쪽지에 답장을 했다. 답신이 오지 않으면 동후를 통해 셋이서 만나면 될 테니 신경 쓰지 말자 생각하면서도 쪽지함에 새로운 쪽지가 오면 옆쪽에 생기는 숫자를 기다리며 잦은 클릭을 하고 있었다.
노트북을 닫고 커피 한잔 하려고 거실로 나왔을 때 동후의 서재 앞에는 책들이 1미터 정도 높이로 서너 줄 벽에 기대 있었다.
"김동후! 너 뭐 하는 거야? 왜 책을 밖에다가..."
"버릴 건 버리고 서재 정리 좀 하려고. 연구한다는 사람이 공부하는 거랑 별 관련이 없는 책이 너무 많더라고."
동후의 서재 안쪽을 들여다보니 책장에서 거의 모든 책이 바닥에 차곡차곡 내려와 있었다. 삼분의 이쯤 비어있는 책장이 갑자기 희서의 마음을 휑하게 만들었다. 저 빈 곳에는 무엇을 놓으려는 걸까.
공부하며 가르치는 사람의 책장은 언제나 미어터진다. 제대로 읽고 배워야 근근이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학생들 앞에 웃는 얼굴로 당당하게 서려면 언제나 손 닿을 만한 곳, 얼른 기억이 될 만한 곳에 참고하고 연구해야 할 책들이 꽂혀 있어야 한다. 평생을 함께 할 자식 같은 책을 정리한다는 건 삶의 큰 변화가 있을 때나 하는 것이었다.
희서의 책장은 희서만의 분류로 두 개의 벽면을 가득 채워 맞춰져 있었고, 꼭대기부터 맨 아래까지 빽빽하게 책이 꽂혀 있었다. 거기에 비하면 동후의 책장은 거의 다 비워지고 있는 것 같았다. 희서의 책장이 저렇게 비워질 땐 아마도 다른 직업으로 바꿔야 할 때나 그럴 것이었다.
초등학생부터 대학원생까지 가르쳐야 하는 희서의 책장은 딱 봐도 연령대별로 그리고 그 연령에 맞는 표지 색깔의 다양함과 디자인에 보탠 상상력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노랑 빨강 파랑 원색의 화려함과 창의성과 상상력을 강조하는 밝고 예쁜 책들이 오른쪽에 풍성하게 꽂혀있다. 짙은 파랑 보라색 진한 회색의 대학생들과 대학원생을 위한 전공 교재들은 왼쪽으로 쭈욱 꽂혀 있는데 점점 채도가 낮아져 우울해지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희서의 서재에 들어가면 오른쪽 책장의 상상력이 왼쪽 책장의 규격화된 전문 영역으로 수렴하는 것 같아 희서가 살아온 색깔을 전시하는 갤러리처럼 보였다. 서재는 집에 오면 희서가 가장 오래 머무는 희서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였다.
그런데 동후는 지금 책장을 거의 비우고 있었다. 어떤 마음으로 책을 정리하는지 궁금했지만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서서 분주히 책을 거실로 나르는 동후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