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하는 희서가 두는 거리가 두려웠다고 했다. 모든 것을 혼자 고민하고 처리하고 아무에게도 의지하려 하지 않는 희서가 항상 위태로워 보였다고 했다. 보고 있으면 그 빛에 매료되지만 금세 사라져 버릴 것 같아 힘주어 잡을 수 없는 살얼음 같은 희서였다며 지난 시간의 불안했던 희서를 회상했다.
미주에게는 희서가 외롭게 지내지 않도록 해달라는 마치 아버지 같은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준하가 그렇게도 따뜻하고 애틋한 사람이었던가. 희서 앞에서는 예민한 떨림이 느껴지는 그야말로 말없는 예술가 같은 준하였다. 사랑을 한다 해도 제멋대로일 것 같은 준하에게서 이상하게도 내가 그렇게도 진저리 치던 아버지가 겹쳐 떠올랐다.
미주의 집에서 생일 파티를 했던 생각이 났다. 가끔 희서의 집에 아이를 데리고 놀러 와 수다를 떨던 일도 모두 준하의 부탁 때문이었다고 생각해야 할까. 가정을 이루고 바삐 사는 미주가 시간을 내준 것만으로도 항상 기뻐하고 있던 희서였다.
"동후는 정말 내가 알 수 없는 친구 같아. 마음을 털어놓고 얘기할 만큼 내가 미덥지 않은가 봐."
희서는 불평스럽지 않게 동후에 대한 감정을 털어놓았다. 오랜만에 만난 준하 앞에서 벌써 마음이 편해지고 있었다. 아마 꼬냑의 기운이 몸과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 탓도 있지만, 준하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가며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희서 자신에 대해 관대해진 느낌이었다. 변하지 않은 모습으로 준하가 희서 앞에 앉아 있다는 게 중요했다. 그리고 준하가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는 것이 기뻤다.
"동후는 네가 쓰러졌다는 얘기를 거의 일 년이나 지나서 내게 전했어. 그때 나는 너무 가슴이 아파서 돌아오려고 했어. 너의 무너진 마음이 금방 회복될 수 없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으니까."
동후가 막았다고 했다. 그때 돌아오면 결국 불행만이 남을 거라며 말렸다고 했다. 희서와 제대로 남은 시간들을 보내려면 준하의 시간이 단단해져야 한다며 하고 싶은 것들, 이룰 수 있는 건 모두 이룬 후 오라고 말했다고 했다. 동후는 정말 이성적이고 냉정한 합리주의자라고 덧붙였다. 지난 5년의 동후와 너무 달랐다. 몽롱한 희서에게 두 사람의 동후가 서 있었다.
"동후에게는 네 곁에 꼭 붙어 너를 지켜달라고 내가 부탁했어. 동후는 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거나 마찬가지지. 동후가 사제가 되려는 것도 모두 포기하고 내 말을 들어주었으니까. 동후는 나를 위해 사는 친구야. 가여운 친구..."
희서는 준하가 동후를 가엾다고 할 때 준하의 눈을 보았다. 애처롭게 나지막이 동후 이름을 말하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친구 부탁에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수 있단 사실이 희서를 놀라게 했다. 희서가 와인에 매달리며 불안정하게 지낼 때 희서를 구하려고 동후가 사제되기를 포기했다고 단순하게 생각했던 희서였다. 일말의 안도감이 느껴졌다. 동후에 대한 책임을 느껴야 하는 것은 희서가 아니라 준하였다.
친구 이상의 친구, 그건 어떤 걸까. 둘에게는 뭔가 틀림없이 비밀이 있는 것처럼 느껴졌지만 희서는 준하가 전하는 마음만큼만 받아들이기로 했다. 때가 되면 서로에 대한 이야기들을 더 깊게 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우리 각자의 사랑에 대한 정의는 모두 달랐다. 각자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충만하게 채우며 살면 되는 것이었다.
꼬냑의 눈물은 아름다웠다. 크리스털 잔을 끈적이며 흐르는 갈색 얼룩의 빛이 희서의 두 눈에 가득 찼다. 희서는 옛날 영화처럼 흑백으로 잔잔해지고 느려지는 기분 좋은 취기를 즐기며 준하와 헤어져있던 상처의 시간들을 애써 메꿔갔다. 술은 마음도 녹이고 몸도 녹인다.
"집에 데려다줄게. 자정이 다 되었네."
턱을 고이고 한참 감고 있던 눈을 떴을 때 희서는 새로운 세상에 들어와 있는 것 같았다. 여러 색깔의 파스텔을 섞어 그려놓은 것 같은 뭉뚱그려진 데칼코마니 같은 세상이었다. 준하가 어디 있는 거지? 일어나면서 휘청거리자 준하가 팔을 잡았다. 준하를 보며 마신 꼬냑의 도수가 더 높았나 보다 생각했다. 세상이 춤추는 색깔로 아름다웠다. 초점 없는 세상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집 앞에 동후가 기다리고 있었다. 준하가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어두운 실루엣으로 보이는 동후가 준하에게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다. 희서는 문득 동후와 준하 사이에서 그녀의 삶이 한 편의 희곡 같다고 느꼈다.
꼬인 삶 속에 엮여있는 건지 꼬인 삶을 풀어가라고 그 매듭 앞에 서 있는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은 희서를 살리고 있었다.
전혀 다른 색깔로 희서를 보호해주고 있는 두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