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 년 동거 라고 해봤자 실제 물리적으로 함께 했던 시간은 서로 공부하고 일하는 데 바빠 1년도 채 되지 않았다. 5년이라는 꽤 긴 시간 동안 서로에게 편했던 것은 희서가 처음에 내밀었던 단호한 사생활에 대한 규칙 때문일 거라 희서는 생각했다.
거실, 주방은 공유하지만 서로의 서재는 허락하에, 침실은 금지였다. 서로 원할 때만 오픈되는 공간들로, 평화롭게 서로를 존중하며 사는 그런 시간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점차 경제적인 부분들이 여유로워지고 생계를 위해 사는 것에서 벗어나자 제대로 사는 것에 대한 욕망이 커지고 있는 중이었다.
희서는 그녀의 변덕과 결벽증이 동후에게 상처를 주진 않았을지 계속 신경을 쓰며 살고 있었다. 국화차를 따뜻하게 만들었다. 동후의 서재는 희서의 서재와는 다르게 문 밖에 아무런 팻말도 걸려 있지 않았다. 희서의 문 앞에는 '반드시 노크!'라는 작은 나무 팻말이 걸려있다. 희서는 그것마저도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볍게 노크를 하고 동후의 서재로 들어갔다. 둘러보니 연구 자료들을 쌓아둔 책상 위에 노트북이 켜져 있었다. 방금까지도 동후가 있었던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갔나 보구나. 책상 한쪽으로 자료를 살짝 밀어 두고 국화차를 놓았다.
어떻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는지 살갑게 물어도 보고 서로의 근황도 같이 얘기하면서 따뜻한 국화차를 마셔야지. 그런 저런 따뜻한 상상을 하니 편안하게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책상을 돌아 나오려다 문득 밝게 켜진 동후의 노트북으로 눈길이 갔다.
이메일함을 열어둔 채 나갔구나 하다가 그 열린 이메일의 짧은 한 줄 제목에 희서는 깜짝 놀랐다.
'Re: 희서는 잘 지내고 있음.'
희서는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이메일을 무의식적으로 클릭하여 열었다. Re: 가 제목에 있다는 건 이메일을 주고받았다는 의미였다. 동후가 대체 누구와 희서에 대해 이야기했는지 너무나 궁금해서 단 1초도 머뭇거리지 않고 동후의 이메일을 열었다.
다른 사람의 이메일을 열어 보는 게 심각한 사생활 침해라는 생각을 그 순간에는 전혀 하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이메일이라서 마치 당연히 열어볼 자격이 있는 것 같았다.
벌컥 연 이메일에서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건 날짜였다. 3년 전쯤의 날짜, 희서는 머릿속이 텅 비는 것 같았다. 오래전부터 동후가 누군가에게 희서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당황하며 희서는 책상에 몸을 기댔다. 충격에 현기증이 났지만 이메일을 어서 다 읽고 싶었다.
보낸사람 김동후 <dhkim@kor….>
받는사람 이준하 <sisyphe@ist.....>
서둘러 본 내용의 시작은 'Dear 준하, '였다. 오른손으로 입을 막았다. 소리를 지를 것 같았다. 그리움도 아니고 슬픔도 아니고 갑자기 덮치는 검은 그림자 같은 공포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지? 희서에게는 하얀 백지처럼 남아있는 준하와의 6년 동안 동후는 계속 연락하고 있었단 거였다.
"어? 국화 향기가 좋은데?"
동후가 서재로 들어와 희서와 눈이 마주치자 방금 한 행복한 억양과는 다르게 눈 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동후는 얼굴이 하얘져서 뛰어가 성급히 책상 위 노트북을 닫고는 뒤로 성큼성큼 물러나 피하는 희서의 팔을 잡으려 손을 뻗었다.
허공을 가르는 희서의 뿌리치는 팔, 창백해진 희서의 얼굴,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희서의 눈을 동후는 가득 슬퍼진 표정으로 대책 없이 그냥 서서 바라만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