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며 다른 선생님들의 수업을 도와야 하는 촘촘한 생활에도 불구하고, 대학 교수직에 끊임없이 지원했다. 학교마다 다른 요구 서류를 작성하느라 눈코 뜰 새 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강의하던 대학 이외에도 전공이 맞으면 낼 수 있는 곳에는 모두 서류를 제출했다. 한국에서 영어 교육 전공 교수는 거의 포화상태였다. 경쟁률이 치열했지만 일단 서류만 통과되면 희서는 자신 있었다.
그런 바쁜 시간들과 함께 하루하루가 휙휙 지나갔다. 미국에서 돌아와 그 많은 지원서 제출에도 연락이 온 곳은 두어 곳뿐이었다. 2학기에 조교수 직을 정식으로 얻게 되면 가장 빠르게 원하는 삶을 살 수 있었지만 항상 일이 잘되는 것은 아니었다.
인력풀 시스템에 서류를 제출하고 등록해 두면 학교가 필요할 때 비정기적으로 개별 연락하여 면접과 시강을 한 후 교수를 뽑는 시스템의 대학교들이 많아지고 있었다.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고 나면 기다리면 될 일이었다.
개별적으로 누군가 찾아가 인사하고 부탁하는 것을 못하는 것이 큰 단점이었지만 희서는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 않았다. 사실 한국에서 그럴만한 연줄도 없는 희서였다. 서류만 되다오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게 일상이었다.
거의 한 학기가 지나서야 시간 강사 경력을 바탕으로 비전임 초빙교수로 지원한 대학에서 연락이 왔다. 어떻게든 시간 강사를 벗어나야 경제적으로도 조금 나아질 수 있었기 때문에 현재의 최선의 길을 택하는 것은 당연했다. 원하던 전공의 전임 조교수 지원은 계속하기로 했다.
다행히 비전임 초빙교수여서 대학의 승인을 받아 초등학교 수업을 계속할 수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조금씩 안정된 생활로 접어들게 되면서 그제야 한국에서 완전히 정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혼자라는 생각은 여전했다. 경제적인 안정은 정신적인 여유를 주고 그만큼 이런저런 생각을 많이 하도록 했다. 희서가 마음의 안정과 위안을 위해 선택한 건 틈틈이 블로그에 일기처럼 글을 끄적이는 일이었다.
그렇게 별생각 없이 아무렇게나 써놓은 글을 누군가 읽고, 단어를 틀리게 썼다며 쪽지를 보내온 것이었다.
대학의 인기 강사가 된 동후가 스승의 날 받은 꽃을 들고 온 날, 일종의 질투였는지 결혼도 아니고 동거도 아닌 이상한 관계에 염증을 느꼈는지, 동후의 가벼운 스킨십을 거세게 뿌리치고 저녁을 준비하다가 벌컥 마음속의 준하를 꺼내버린 것이었다.
‘준하는 나에게 머무는 사람이야…’
그러고 나서 다가오는 희서 자신에 대한 가련함과 동후에 대한 연민에 글을 썼던 것이었다. 그런데 그 글에서 잘못 쓴 한 단어에 대한 쪽지를 받다니, 글을 고치고 나서도 희서는 뭔가 정말 크게 잘못이라도 한 듯 우울한 며칠을 보내고 있었다. '가진' 대신에 잘못 썼던 '갖은'이 대체 쪽지 보낸 사람에게 얼마나 중요하길래 그런 건지 이해불가였다.
그런 마음 불편한 날들을 보내던 중 6년 만에 준하가 왔다고 동후가 소식을 전해왔던 거였다. 희서는 아무렇지 않은 듯 호탕하게 대답은 했지만 순간 가슴은 터질 듯이 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