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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를 보면 떠오르는

아주 어릴 적 각인된 기억

by 시마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 '버드나무'가 내 어릴 적에는 종종 보였다.


아니, 어쩌면 어릴 적 내가 살던 동네의 고등학교 옆 길에

유독 버드나무가 심어져 있던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 어쩌면 바람이 살랑거리던 시원한 날씨에

그 버드나무 아래로 송충이가 후드득 하고 떨어지던 충격적인 장면

내 기억에 각인된 것인지도 모른다.

버드나무.jpg 호숫가 산책 중에 발견한 버드나무

그렇다. 내가 버드나무를 보며 가장 먼저 떠올리는 것은 송충이다.

그 길을 지날 때 머리를 실내화 가방으로, 또는 손으로 가린 채
전력질주하여 그 아래를 빠르게 달려 지나갔던 기억이 난다.
또래 친구들과 함께 낄낄거리며 달리던 국민학생(현 초등학생) 때의 추억이다.
250922_164252_1.png 바로 이 길이 송충이 지뢰밭이었다. [출처 : 네이버 지도, 수성고 옆 길 (2010년)]

이 사진을 보니 지나온 추억들이 좀 떠오르는데,

이때 국민학교 저학년이던 나는 매일 700여 미터를 등하교했다.

(지금과 달리 당시엔 학교가 많지 않았다.)


그리고 그 시절 오락실이 곳곳에 있었는데,

동네에 또래 친구들이 잘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오락구경이 신났던 건지

몇 시간이고 오락실에 죽치고 앉아서 다른 사람들이 오락하는 것을 구경하곤 했다.


그러다 수성고 형들이 점심시간에 나와 오락실 게임을 하다가 점심시간 끝나는 종이 울리면

옆에서 구경하던 내게 "야, 여기서부터 니가 해!" 하고는 학교로 서둘러 뛰어가곤 했다.


그럼 '이게 웬 횡재냐?' 하고 자리를 잡고 게임을 하려는데 그 순간,

오락실 주인아저씨가 다가와 오락기의 전원을 끄셨다.

지금 생각하면 그 아저씨도 참.. 못됐다.. ^^;


내가 쓸데없는 기억을 좀 잘하는 편인데..

그때 유독 난이도가 높았던 게임이 있었는데 '열혈경파 쿠니오군'이다.

당시에는 다른 이름으로 불렸을 거다.

kinda109R_2012_04_13_03.jpg 열혈경파 쿠니오군 [출처 : 게임메카]

버드나무를 볼 때면 꼭 기억나는 한 가지가 더 있는데,

아마도 국민학교 1학년 때였을 것이다.


그때, 아버지가 내 숙제를 봐주셨던 것 같은데 숙제 문제는 다음과 같았다.

버드나무를 보면 어떤 생각이 드나요?


"버드나무를 보며 생각나는 것을 쓰세요."
"버드나무를 보면 어떤 기분이 드나요?"

정확한 워딩은 기억나지 않지만 아무튼 이런 질문이었고 나는 다음과 같이 답을 적었다.

아빠와 같이 나무아래에 나란히 서 있는 생각


그리곤 아버지에게 혼났다.

"버드나무는 잎이 아래로 축 처졌으니, 바람에 잘 흔들릴 것 같다든지..
바람에는 잘 흔들리는데 부러지지는 않는 게 신기하다라던지.."

뭐, 이런 식의 답이 나와야 하지 않겠냐는 말씀이셨다.


그래서 답을 고쳐 썼던 아주 어린 시절의 기억이 난다.

어릴 적 그 상황을, 답을 잘 못 적어 혼난 것으로 기억하고 있었지만

사실 어쩌면 그날 아버지는 나에게 혼을 냈다기보단,

이런 방식으로 답을 찾아가야 한다라는 나름의 가르침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어린 마음에 얼굴이 화끈거리며 서운해하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지금 두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한 번쯤 생각을 해본다.


내가 아이들에게 했던 잔소리들이
사실은 나도 경험을 통해 체득한 것들인데,
아이들도 결국은 스스로 경험을 통해서야 알 수 있는 것들이니
그들도 그 경험의 시간들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 버드나무에 대해 알아보자


1. 강가에 흔히 만나는 나무

버드나무는 전 세계에 분포한다.

4월이면 꽃이 피고, 5월이면 솜털 같은 씨앗이 바람에 흩날린다.


흔히 흰 솜이 날리면 알레르기를 떠올리지만, 사실 그것은 꽃가루가 아니라 씨앗이다.

따라서 보통의 꽃가루 알레르기와는 무관하다는 사실.

게다가 버드나무는 자웅이체라 암수 나무가 구분되는데, 씨앗 날림이 싫다면 수나무(수그루)만 심으면 된다.

250922_172955_1.png 암꽃(좌)과 수꽃(우) [출처 : 국립생태원]

또한 버드나무는 공해에 강하고, 물을 정화하는 능력이 뛰어나 예전에는 우물가에 심어두기도 했다.

오늘날 가로수로 쓰이는 이유도 바로 이런 생태적 강인함 때문이다.


2. 늘어진 가지와 작은 꽃

모든 버드나무가 늘어진 것은 아니고, 능수버들과 수양버들만 가지가 길게 늘어진다.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고개를 숙이는 듯한 모습 때문에, 영어 이름은 ‘Weeping willow’다.

직역하면 ‘울고 있는 나무’.

그림1.png 능수버들(좌)과 수양버들(우) [출처 : 나무위키].

꽃말은 ‘솔직’.

봄날 피어나는 작은 꽃은 보송보송한 모습 때문에 한국에서는 ‘버들강아지’라 불렸고,

일본에서는 갯버들의 꽃을 ‘네코야나기(버들 고양이)’라고 부른다.

강아지와 고양이의 이미지가 교차하는 점이 흥미롭다.

boshing_218059_1[295281].jpg 봄의 버들꽃 [출처 : 오마이뉴스]

3. 전설과 속설

버드나무는 오래전부터 속설과 전설 속에 등장했다.

양기가 강해 귀신이 가까이하지 못한다고 믿었고,

그래서 무당은 귀신을 쫓을 때 버드나무 가지를 휘두르며 굿을 하기도 했다.


또한 썩은 버드나무줄기 속에 벌레 사체가 쌓이면 인(P) 성분이 나오는데,

습한 날씨에는 푸른빛을 내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를 ‘도깨비불’이라 불렀다.

어릴 적 산 어귀에서 어슴푸레한 불빛을 본 기억도, 어쩌면 이런 현상이었을지 모른다.


4. 생활 속 구전

버드나무는 우리의 생활 속 믿음에도 자리했다.

옛 어른들은 “물을 마실 때 체하지 말라”며

우물 위에 버드나무 잎을 띄워두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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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적 근거와는 무관했지만,

자연을 의지하며 살던 삶의 방식이 고스란히 담긴 풍습이다.


5. 약으로 쓰인 나무

버드나무의 껍질과 잎은 오래전부터 해열과 진통제로 쓰였다.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인들은 이미 그 효능을 알았다.


조선시대 이순신 장군도 과거 시험 도중 낙마하여 다리를 다쳤을 때,

버드나무 가지로 응급처치를 하고 시험에 응시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오늘날 우리가 흔히 쓰는 '아스피린'의 기원 역시 버드나무다.

껍질 속 살리실산을 화학적으로 가공해 만든 것이다.

(살리실산에 아세트산과 에스터화 하여 아스피린 생성)


6. 이별과 재회의 상징

중국에서는 이별하는 이에게 버드나무 가지를 꺾어주며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한다”는 의미를 전했다.

‘버들 류(柳)’와 ‘머무를 류(留)’의 발음이 같기 때문이다.


이 상징은 2022년 베이징 동계올림픽 폐막식에서도 활용되었다.

250923_201255_1.png 출처 : 스브스 뉴스 유튜브 영상에서 발췌

옛 여인들은 사랑하는 이와 작별하며

“빨리 돌아오지 않으면 내 마음도 버드나무처럼 흔들릴 것”이라 말하며

버드나무 가지를 건네기도 했다.


7. 어린 시절의 기억, 잘못된 정보

어릴 때엔 털 있는 애벌레를 모두 ‘송충이’라 불렀다.


사실 송충이는 소나무에 붙는 솔나방의 유충이고,

흰불나방이나 재주나방 등 다양한 종이 있지만,

당시에는 잘 몰랐고, 털 있는 애벌레는 모두 송충이로 통했다.


8. 지금도 곁에 있는 나무

버드나무는 성씨 ‘류(柳)’에도 남아 있고,

창립자 '유일한' 박사의 유한양행 로고에도 담겨 있다.

다운로드.png 출처 : 나무위키 '유한양행'

오늘날에도 도심 한가운데 가로수로 서서

미세먼지를 흡수하고, 바람에 몸을 흔들며

묵묵히 우리 곁을 지킨다.


마무리

버드나무는 단순히 강가에 서 있는 나무가 아니다.

물가를 정화하는 생태의 동반자,

귀신을 막는 민속의 상징,

해열제를 낳은 약리학의 원천,

이별과 재회의 은유,

그리고 생활 속 구전과 어린 시절의 기억.


한 그루의 나무에서도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발견한다.
어쩌면 우리 삶도 마찬가지다.
겉보기엔 하나의 줄기 같지만,
그 안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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