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개월 아기와 6살 아이를 키우는 엄마에게 혼자 똥 쌀 자유는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
잘 놀다가도 꼭 볼일 볼 신호가 와 화장실로 가면 아이는 그때부터 기다렸다는 듯 징징 데기 시작한다. 항상 자신의 주변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자신만 바라보거나, 놀아주어야지만 만족하는 것이 아기의 본능일까? 엄마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의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나의 인간으로서 마땅히 해결해야 하는 것은 어쩌란 말인가!
남자아이라서 그런 걸까? 첫째 여자아이를 키울 때 느껴보지 못한 활동양이다.
우리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면 신발장이 왼쪽에 있고, 신발을 벗으며 오른쪽으로 거실이 보인다. 약간의 복도에는 왼쪽에 6살 아이방, 오른쪽에 화장실이 자리하고 있다. 첫째 딸아이를 키울 때는 집안에 아이가 아무 곳이나 갈 수 없도록 막아놓는 안전문을 설치하지 않아도 별다른 불편이나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둘째는 달랐다. 6살 아이방과 화장실을 지나면 안전문이 거실을 막고 있다. 항상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매는 듯 16개월 아이는 끊임없이 주변을 살핀다. 그렇다 보니 집안에 안전문은 여러 곳에 설치되어있다.
거실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방이 하나 더 있고 그 옆에 주방이다. 주방으로 가는 입구에도 안전문은 어김없이 설치되어 있다. 아이가 거실에서 안전하게 놀 수 있도록 거실을 막아놓은 것이다.
거실에서 16개월 아이랑 같이 편안하게 있다가 급 신호를 느낀다.
첫째는 현재 자신의 방에서 캐릭터 색칠 중이다. 난 해결해야 한다. 아이가 편안해 보이고 블록을 가지고 놀고 있어 거실 화장실로 향한다. 화장실 문은 당연히 열어둔다. 아이 둘을 키우며 나와 아이들만 있는 경우 아이들 눈에 내가 항상 보여야 하기 때문에, 문을 닫고 볼일을 해결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열린 문으로 아이를 살핀다. 내가 거실을 비웠다는 것에 크게 동요하지 않고 잘 노는 걸 확인하고 큰 숨을 몰아쉰다.
이런! 몇 초 되지도 않았는데 아이가 안전문에 매달린다.
하~ ‘어 여기 있어’라고 외치며 아이를 쳐다본다.
벌써 안전문을 넘으려고 흔들고, 발을 올리고, 낑낑거리기 시작했다.
얼른 첫째를 불러 문을 그냥 열어주라고 부탁한다. 다행히 6살인 첫째는 의사소통도 되고 말도 잘 들어주어 좀 편안하다.
문이 열리니 아이가 화장실로 쪼르륵~ 뛰려는 순간! 바닥에 있는 매트 가장자리에 걸려 넘어진다. 이런! 아이의 울음소리에 이미 상황은 아수라장이 되었고 급하게 일어날 수 없는 처지의 나는 첫째 아이를 불러 ‘동생을 이쪽으로 데려와봐’라고 부탁했다.
울고 있는 둘째의 왼쪽 다리를 신이 난 듯 잡고 번쩍 들어 올려 깔깔 데며 끌고 오는 첫째로 인해, 둘째는 더 자지러진다. 어느 정도 가까이 온 둘째가 중지와 약지를 입에 넣고, 빨다 울다를 반복하며 나를 쳐다본다. 아이에게 ‘어 일루 와’라고 말하니 울며 슬금슬금 일어나 나에게 온다. 나는 앉은 자세 그대로 아이를 들어 올려 무릎에 앉히고 등을 토닥인다. 아이의 울음이 멈추며 안정을 찾아가는 듯 하지만 나의 안정은 찾을 수 없음이 확실시되며, 아이와 한 몸이 된 채 마지막까지 함께했다.
아이가 자라면서 그때그때 바라는 것이 바뀐다. 빨리 뒤집었으면, 빨리 앉았으면, 빨리 걸었으면, 빨리 말했으면, 아무렇지 않게 ‘왜 안 걸어? 왜 말 안 해?’라고 묻는 현명하지 못한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말하지 않아도 내 아이가 늦으면 어쩌나 걱정을 한다. 각자의 시간이 있는 건데, 그걸 인정해 줄 만큼 나는 현명하진 않은 걸까? 나의 걱정과 달리 자신의 성장시간에 맞추어 잘 자라 혼자 똥 싸는 6살 아이에게 감사함을 느낄 때가 있다. 하지만 꼭 식사 중 급 신호가 오는 우리 6살 첫째, 혼자 똥 쌀 자유는 주어졌지만 아직 혼자 처리할 자유는 생기지 않은 첫째로 인해 꼭 밥 먹다 말고 아이의 뒤처리를 해주러 화장실로 가곤 한다. 아이의 깔끔한 뒤처리를 위해 첫째와 함께 변기에서의 마지막을 함께했지만, 나의 식사는 깔끔함과 안녕한 지 오래다.
아이 둘을 키우며 접해보지 못했던 여러 가지 일들을 마주하게 된다. 너무나 행복해 이 시간이 아주 천천히 지나가기를 바라는 한편, 자유를 갈구하며 탈출을 꿈꾸기도 하는 이중적인 모습의 나를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