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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에 결혼은 없는 줄 알았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길지도 몰랐고, 아이를 낳을 거라는 건 상상하지도 못한 일이다. 20살부터 여행이 좋아 20살에 면허를 따고 차를 사고 우리나라 모든 곳을 누비며 다녔고,
“Seize the day”는 나의 인생 좌우명이 되었다.
‘결혼을 하지 말아야지’ 생각한 적도 없지만 ‘결혼을 꼭 해야지’라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자유로운 삶에 만족했고, 하고 싶은 일 하며 친한 친구와 여행 다니는 내 삶은 완벽했다. 결혼의 필요성을 느껴본 적 없고, 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41세 봄을 기다리는 1월, 그를 만난 후 모든 것은 바뀌었다. 결혼을 원하는 엄마의 소개로 만났다. 어디서 만나면 좋겠냐고 묻는 그에게 내가 사는 동네 카페를 선택해 약속을 잡고 5분 정도 늦게 도착했다. 결혼 생각은 전혀 없었고, 엄마가 원하니 '한번 나가서 밥만 먹고 와야지.'라는 생각으로 나선 길이었지만 마음에 들지 않고 싶지 않았고, 쉬워 보이고 싶지도 않았다.
별 감정이 생기지 않는 농촌 총각 같은 아저씨가 너무도 떨리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며 어색하지 않은 척, 괜찮은 척, 하는 얼굴로 입술에만 부자연스러운 미소를 띠며 인사한다. 나는 항상 그렇듯 경쾌한 척, 쿨한 척, 나 어때,라고 뽐내는 듯한 웃음을 띠며 인사한다. 우리는 인사부터 너무도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고, 그건 나에게 나쁘지 않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엄마 말로는 여자 앞에서 말을 잘 못 한다고 했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나중에 그는 여러 번의 선을 봤지만 자신이 그렇게 말을 많이 한 건 처음이며,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내고 대화를 이어가는 일도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모르는 사람과도 난 참 대화를 잘한다. 그날도 이것저것 얘기한 거 같긴 하다, 마음에 들어서라기보다 수줍어하는 그가 귀여워 더 대화를 이어간 게 아닌가 싶다.
그렇게 난 45세 부끄러워 여자 얼굴도 잘 못 쳐다보는 남자를 만났다. 두 번째 만난 날 커피숍에 나란히 앉아 2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었다. 무슨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색하지 않았고, 주변 사람도 의식하지 않았고, 즐거웠다. 잘해주고 싶었고, 이 사람과 결혼할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45년이라는 인생이 무색하게 안 해본 게 너무 많은 이 남자에게 너무 많은 경험을 갖고 있는 나는 모든 걸 알려주고, 데려가고 싶었다. 우린 그렇게 많은 경험을 다 하기 전 아이가 생겼고, 41세 나는 그해 여름에 결혼을 하고 그해 겨울 혜림이를 낳았다. 4년 뒤 45세 나는 둘째 현수까지 낳아 지금 15개월 왕자와 6살 공주를 키우며 너무도 행복한 날들을 보내고 있다.
엄마는 너무나 급해 보이는 나에게 결혼을 미루면 어떠냐고 물었다. 딸이 결혼하길 원했지만 막상 결혼을 준비하는 딸에게 서운함을 감추지 못하셨다. 30년 가까운 세월을 함께한 친구 또한 서운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고 결혼하지 않길 바랐다. 이 사람을 만나기 전 나에게 가장 소중한 두 사람인데, 이 사람으로 인해 살짝 멀어지는 감정을 느꼈다. 사람이 모든 걸 다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고 내 인생 처음 느낀 사랑하는 감정은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은 오히려 엄마는 유서방에게 좀 잘하라고 항상 말씀하신다.
하지만 30년 가까운 세월을 엄마보다 더 가까이 지낸 친구는 서로 응원하며 축하해 주지만, 예전과 다름을 느끼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가며 우리는 좀 더 단단해져 서운했던 일들을 잊고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리라 믿어본다.
‘살면서 왜 이렇게 안 해본 게 많아?’라고 그에게 물으면 나를 만나려고 아껴두었는데, 아껴두길 잘했다고 말한다. 내가 어떻게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났을까 생각하며 감사하고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아마도 내 인생의 화양연화는 이 사람을 만나고 우리 아이들을 만나 살아가는 이 모든 날들이라 생각이 든다.
나의 화양연화는 지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