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이미지적 재구성, 애벗의 <서사학 강의>를 바탕으로
구조는 선택을 통해 형성된다. 애벗의 예시에서도 나타나듯 스토리에 그다지 일조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작은 보충적 사건까지도 서사 전체의 맥락에 영향을 끼친다. 또한 모든 스토리는 중개와 구조화 활동을 동반한다. 서술자에 의한 선택이 이루어지지 않는 서사 담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에게 제공되는 서사가 언제나 서술자의 입맛에 맞춰 선택된 세부 사항들로 이루어진, 서술자에 의한 서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나는 애벗이 제시하는 선택과 구조화의 논의가 다루어야 할 가장 중요한 서사 작업이 바로 역사의 구조화 주체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해당 글에서는 하룬 파로키의 <베스터 보르크 수용소>를 통해 역사 속에서 이루어진 서사적 선택과 그 선택에 대해 이루어진 재선택의 작업을 탐구해볼 예정이다.
<베스터 보르크 수용소>는 가해자인 나치 장교의 지시 하에 찍혀진 영상을 활용한다. 하룬 파로키는 가해자의 논리에 의해 선택된 기록들을 수 십년 후 다시 선택하고 배열하는 방식으로 기존의 영상을 재편집했다. 수용소의 영상에 이어, 파로키가 삽입한 자막이 이 영상물을 찍은 카메라맨이 몇 달 후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어 참살당했다는 정보를 제공한다. 해당 정보는 나치의 서사 속에서 선택되지 않은 사건이다. 나치의 요구로 영상을 기록한 카메라맨 루돌프라는 인물은 파로키의 설명 없이는 그 존재조차 알 수 없다. 모든 영상물은 표면적으로는 평화로워보이며, 다른 수용소의 기록에 비해 무색하게 느껴질 정도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영상의 서사가 나치가 선택한 사건들로 점철되었기 때문이다. 나치가 찍은 수용소의 이미지들, 나치에 의해 선택된 사건들은 베스터 보르크 수용소의 서사를 일부 은폐한 결과이다. 나치의 영상 속에는 유개화차 안에서 웃으며 손을 흔드는 아이의 모습도 보인다. 하로키는 모든 유개화차가 절멸 수용소로 향했다는 보충적 사건을 덧붙인다. 영상 속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아우슈비츠로 끌려가 참살당했다는 사실을, 하로키는 빼놓지 않고 다시금 선택한다.
서사는 서술자의 선택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그로 인해 때로는 역사라는 서사의 서술자 자리에 가해자가 들어설 수도, 가해자의 시선에서의 서사가 역사로 인식될 수도 있다. 모든 역사가 승자의 역사라는 말은 곧 모든 역사가 승자의 선택으로 이루어진 서사라는 말이기도 하다. 애벗의 서사학 실사례로써의 파로키의 <베스터 보르크 수용소> 작업은 한편으로는 누군가의 선택을 거칠 수밖에 없는 서사의 뼈저린 한계를 보여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작업은 영화가 가해자에 의해 구조화된 서사를 재선택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해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역사는 모든 인간이 당사자인 서사인 만큼, 서사에 대한 논의에 있어 무엇보다도 중대한 문제로 여겨져야 한다. 결국 우리가 역사 앞에서 해나가야 할 일은 끊임없이 과거의 선택에 참여하지 못했던 사람들을 선택에 참여시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