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실실의 솟구침
히토 슈타이얼은 그의 저서 <진실의 색>에서 다큐멘터리의 진실성을 향한 불확실성이야말로 다큐멘터리의 진정한 성질이라 말한다. 다큐멘터리 카메라는 정말 객관적인 진실을 포착할 수 있는가,라는 문제를 둘러싼 리얼리스트와 구성론자들의 논쟁 사이에서 <어느 비교>가 위치하는 지점은 다소 모호하다. 우선 하룬 파로키에게 다큐멘터리의 구성적 특성은 양가적으로 다가온다. <세계의 이미지와 전쟁의 각인>은 나치의 소각장이 찍힌 항공사진을 얻고도 소각장의 존재를 발견하지 못한 유럽 연합군의 사례를 통해 객관적인 이미지를 두고도 빗겨나가는 인간의 구성적 인식의 한계를 지적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는 <꺼지지 않는 불꽃>에서 네이팜탄에 전신화상을 입은 소년의 직접적 이미지를 자신 손에 담배를 지지는 행위로 대체하며, 작가의 개입이 요구되는 순간에서의 구성적 역량의 필요성을 입증하기도 한다. <어느 비교>는 리얼리즘과 구성주의 둘 중 어느 한 편에도 기대지 않는 대신, 둘 사이에서 진동하며 노동의 실태를 경유해 슈타이얼이 말하는 다큐멘터리 이미지의 불확실성을 탐지하기를 택한다.
<어느 비교>가 배열을 통해 그리는 노동의 풍경은 관객에게 그리 새롭지 않다. 아프리카의 마을로부터 출발하는 카메라는 스위스에 도착한다. 이 몽타주의 궤적은 다분히 선형적이며, 제3세계의 진흙 벽돌로 빚어진 학교에서 유럽의 기계화된 공장으로의 전환은 두 문명 사이 괴리를 포착한다. 유럽의 건축학과 학생들이 인도의 고아원 건설에 참여하는 장면에서는, 노동에 물리적으로 참여하는 인도인들의 육체와 그들이 쌓아 올릴 건물의 스케치를 그리는 유럽 학생들의 손이 교차편집되기에 이른다. <어느 비교>를 보고 놀랄 관객은 존재하지 않는다. 관객은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권력 구조를 이미지로 재확인할 뿐이다. 이것이 이 작품의 첫 절반의 구성이 지시하는 방향이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의 이미지는 거기에서 멈추지 않는다. <어느 비교>의 나머지 절반, 혹은 후반부에서 선형성은 잠시 붕괴하는데, 초반부에 등장했던 간도의 건설 현장이 재등장하는 장면이다. 온 마을의 주민이 모여 학교를 짓는 모습은 기계화된 공장들의 연쇄 사이에서 솟아오른다. 물론 이 장면은 이후 완전히 자동화된 스위스의 건설 현장과의 비교를 위해 등장한 장면이며, 직후의 쇼트가 나오면 이 마을의 이미지는 다시금 기술의 선형성이라는 의미 생산에 종속된다. 그러나 아프리카의 노동 현장과 유럽의 노동 현장이 잠시나마 평행 관계에 놓여있던 그 찰나는 아프리카와 유럽이 동일한 시간상에 존재한다는 감각을 일깨운다.
현실은, 아프리카의 미래가 유럽이 아니며, 유럽의 과거는 아프리카가 아니라는 데에 있다. 진흙 벽돌과 손으로 이루어지는 건축과 전면 기계화된 자동 건축과 동시에 일어나고 있다. 그것이 세계 노동 상황의 리얼리티다. 제1세계와 제3세계라는 분류를 낳은 서구중심적 인식에 의해 사라진 리얼리티. <어느 비교>의 구성은 한편으로는 문명 간의 기술 격차를 척도 삼아 제3세계와 유럽이 선형적인 과정적 관계에 있다는 확신에 충실히 가담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그 구성 속에서 그러한 인식을 전복시키는 리얼리티가 몽타주가 잠시 어그러지는 순간으로부터 출현한다. 다큐멘터리는 주관적 구성성에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며, 유럽과 제3세계가 수직적인 관계에 놓여 있다는 환상은 아직까지 견고해 보인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구성 사이에서 리얼리티는 잠시나마 솟아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