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찬 바람이 불고 스산하기 그지 없는 을씨년스러운 아침, 1시간 반 여 산책을 하고 간단히 요기하고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다. 아메리카노 한 잔 테이크 아웃하면서 맞는 바람도 공기도 천연 에너지 드링크가 되어준다. 일요일 아침 도로는, 거리는 한산하다. 이런 날씨에, 이 바람에 이처럼 일찍 거리에 나오는 것도 실은 드물다.
늘 서가에만 들러서인지 열람실이 오전 8시에 여는 줄 몰랐다. 똑같이 9시에 여는 줄 알고 좀 더 기다려야겠군, 좀 더 걷자.했다가 도서관으로 향하는 학생들의 걸음을 따라 들어갔다. 자리잡고 숨죽이듯 조용히 노트북을 꺼냈다. 숨죽이는 듯한 고요.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암묵적인 고요와 침묵...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 있다.
점심 약속 전, 이곳에서 그렇게 시간을 보내다 가야지. 2층 서가로 내려가 책도 몇 권 빌려 가야지... 그렇게 나의 고요한 일요일 아침을 활기차게 열었다.
오전 6시쯤 집에서 나왔는데 거센 바람도 차가운 공기도 내 걸음을 멈추게 할 수 없었다. 무슨 일이 있지 않는 한, 치명적이지 않는 한, 걷기로 마음 먹었으면 걸어야 한다. 걷는 일이란, 산책이란 날 살게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알아차리는데 이만큼 즉각적인 게 없다.
휘몰아치는 바람에 낙엽들이 흩날려 사방으로 그네타기를 한다. 그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자연스러운 이치이므로. 별 거 아닌 것이 아니라 실은 이 세상 모든 것은, 자연은 만물은 이토록 기적이고 경이로운 것이다. 이런 감동을 모르면, 감탄할 줄 모르면 내가 사는 세상이 어찌 아름다워보일 수 있을까?.
감사하는 마음, 감동, 감탄, 경이로움을 만끽하는 건, 향유하는 건, 인간에게 이토록 중요한 것이다. 내 걸음을 잠시 멈추게 하는 것이 있었다. 3-4cm정도 길이일까. 검은색 무언가가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름은 모르겠으나 갑각류였다. 산책로 안에 연못이 있어 갑각류가 있는 게 의문스럽지 않았다.
"이 아침 너를 만나려고 했구나.! 오늘의 인연이네!" 하고선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새 산책로엔 떨어진, 그 사이에도 쉼없이 떨어지고 있는 낙엽들로 가득했다. 길을 걷고 있는 것인지 꼭 구름위라면 이런 것일까.싶을만치 낙엽위를 완연하게 걷고 있었다. 낙엽도 나와 같다고 생각해선지, 자연과 나는 하나라는 생각에선지 언제부터인가 이런 낙엽들을 휙휙 밟는 걸 잘 하지 못하겠다. 무튼 피할 순 없으니 아주 조심스럽게 사이사이 걸어나갔다.
아침 산책은 실은 자연 관찰기가 되기도 한다. 관찰할 거 투성이다. 느끼는 거 투성이다. 알게 되는 거 투성이다. 깨닫게 되는 것 투성이다. 사색할 거 투성이다. 사유할 거 투성이다.
바람이 가장 거세게 불 무렵, 산책로에서 가장 큰 나무 옆을 지나고 있었다. 느티나무인 것 같은데, 크기가 상당하다. 길게 늘어진 나뭇잎들이 내 키와 같아 내 손가락이 닿을 만큼 되는 것도 있었다. "분명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는 나뭇잎들 무게가 상당할텐데, 저 나무의 뿌리는 정말이지 얼마나 단단하게 뿌리박혀 있는 걸까?..." 바람이 잦아들때까지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서있었다. 그러곤 한참을 바라보았다.
"얼마나 오랜 세월 견뎌왔을까? 얼마나 되어야, 어떻게 해야, 이렇게 비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모든 것이 온전한 걸까? 나무에게 경외감마저 들었다. 크고 오래된 그 나무가 내게 꼭 스승같았다.
자세히 보니 나뭇가지와 나뭇잎들도 분명 흔들리고 있었다. 바람결대로 왼쪽으로도 휘었다가 오른쪽으로도 휘었다가 중심을 잃기 십상이었다. 그러다가도 분명 제자리로 돌아와 가운데 중심을 잡고 언제 그랬냐는 듯 온전하게 꼿꼿하게 서있다.
그 순간 흔들리는 나뭇가지와 나뭇잎들이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날 흔들리게 하는 것들, 생각과 마음들이고 땅속 깊이 단단히 박혀있는 그 뿌리는 그대로 온전한, 늘 그자리에 있는, 흔들림 없는 나, 변함없은 나, 이토록 평온한, 이토록 고요한 나.라고 생각했다. "그래, 진짜 나.는 그 무엇에도 흔들림이 없어. 없는 것이야. 진짜 나는 이토록 고요하지. 평온하지...."
이 뿌리깊은 나무처럼, 나도 어떻게서든,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상황에서든 내 두발을 이 땅에 꼭, 단단하게 닿고 있어야지. 절대 떨어뜨리지 않아야지. 붕뜨지 말아야지.
한 시간 반 여의 시간은 이토록 농밀하고 농후한 사색의 시간이다. 어쩜 온통 절로 관찰하게 되는 건지. 그 속에서 어쩜 절로 사색과 사유가 이는지. 깨달음이 이는지. 늦은 깨달음을 사랑하게 되었다. 세상 물정 몰랐던 시절보다 지금이 진짜 나다워지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이것저것 직접 부딪혀가며 얻어낸 경험과 체험들로 얻어낸 삶의 지혜와 앎과 늦은 깨달음과 통찰에 진심으로 감사하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서른에서 서른 후반에 걸쳐 알게 된 것들이, 늦은 깨달음이 내겐 더할나위 없는 지혜의 샘이다.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와, 여전히 열람실 안은 고요하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열람실 공기.를 온몸으로 맞고 있자니, 학창시절 생각도 나고 열람실 안에서 열심히 수학문제집과 영어문제집을 풀고 있는 중고등 학생들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생경한 마음이 든다. 내가 다시 그 시절로, 중고등학생 시절로, 저 나이로 돌아간다면...? 택도 없는 상상을 한다.
"그래도 만약에. 그니까 정말 만약에 말이지... 그럴 수 있다면... 어떻게 할거야? 어떻게 하고 싶니?..." 내 안의 소리가 끊임없이 질문을 해댄다. "그때의 초아로 돌아간다면, 중학생, 고등학생 초아에게 너는 무슨 말을 해주고 싶어?"
"나? 걱정하지 말라고!. 그리고 공부! 정말이지 네가 그렇게 열심히 하고 있는 그 공부.! 정말이지 네 인생에 전부가 아니라고!. 진짜 중요한 건, 네 자신을 아는 것. 네 자신을 궁금해하는 것. 네 자신에게 질문하는 것.이라고.! 진짜 배워야 할 것은 바로 그거라고.! 그렇게 말해주고 싶어."
"저 아이들은 알고 있을까? 알까?... 부디 너무 스트레스 받지 않고 좀 더 일찍 자기 자신에 대해 질문하고 답하는, 궁금해하는 시간을 갖기를...”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기에. 흐뭇하게 바라보면서 다시 나의 자리로 시선을 옮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