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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olievibes Nov 19. 2024

엄마와 딸은

따뜻한 침대 위 이불 속으로 들어가기 전, 바디 버터를 손에 발랐다. 늘상 바르는 거면서도 바를 때마다 새롭다. 같은 향인걸 분명 알면서도 늘 처음 바르는 기분이랄까. 향기덕분에 잠자기 전, 내 방의 모든 것들이, 지금 이 순간이 완벽하게 조화로워 보였다. 그 와중에 잠자기 전,이라고 타이핑 하자마자 카프카의 <변신, 시골의사>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가 떠올랐다. 카프카의 소설을 읽으면, "어쩜 이런 글을 쓸 수가 있지? 글을 이렇게도 쓸 수가 있는 것이구나!." 경이롭고 감탄스럽다. 무튼 이토록 무작위한 사유. 자유로운 것이다.


창문도 살짝 열어놓았다. 실은 내 방이 이토록 차다. 차가운 공기, 살얼음 같은 공기에 둘러싸여 있다. 정확히는 누워있는 침대 위만, 이불 안만은 무척이나 따뜻하고 뜨뜻하고 그 외 모든 공기는 차다. 바깥 공기와 내 방 안의 공기가 같지 않을까. 안과 밖이 전혀 이질적일리 없는 공기 안에서 나는 앉았다 누웠다를 반복한다. 사방을 둘러 보니, 침대 옆엔 다이어리와 필통이 창틀에 올려져있고 책 한 권이 있다.


잠도 덥지 않은 온도라야, 살짝 차야, 시원해야 잠이 잘 온다. 이불 안에 있으면 춥지 않다. 충분히 견딜 수 있는 것이 된다. 이불 밖 얼굴과 손, 상체는 차고 이불 안은 따뜻한 밸런스가 내겐 최적이다. 깨어있게 한다. 정신의 고삐를 놓치지 않게 한다. 정신이 번쩍이게 한다. 추운 사이, 추위를 느끼는 사이 내 몸 안의 생체조직과 혈관들은 자기 만의 일을 하고 있겠지. 분주할테지... 이 추위가 내게 해롭기보단 외려 유익할거란 생각이 있다.


독립한 후로는 그러니, 꽤 오래 되었다. 난방을 켜놓고 생활하지 않은지. 물론 맹렬한 한파일 땐 켠다. 집 안 공기를 따뜻하게 후끈하게 달군 뒤 껐다 켜기를 하지만, 그 외 웬만한 추위에는, 날씨엔 끄덕없이 잘 만 지내고 있다. 부쩍 맹렬해진 추위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방을 켜지 않는 이유.가 불현듯 머릿속에 떠올랐다. 정말이지 난방을 하지 않는 이유는 이토록 단순한데, 이토록 시시해서. 난방비도 적게 나올수밖에. 실은 전기 매트가 있어서 가능한 것이지만 난방을 하지 않고 살아도, 전기 매트 하나로도 충분히 겨울을 잘 날 수 있구나.를 실감한다.


언제부터인가 추운 겨울이 좋아졌다. 차가운 계절을 사랑하게 되었다. 겨울만이 줄 수 있는 그 특유의 스산함, 쓸쓸함, 고독, 을씨년스러움을 사랑하게 되었다. 눈 내리는 날이면 여전히 소녀가 된다. 그러면서 생각한다. 우리 모두는 실은 여전히 소년소녀라고. 변하지 않는 그것. 각자 자기 안에 있다고.


겨울이면 단연 따뜻한 팥죽과 호박죽이다.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난데 팥죽과 호박죽이 생각 날 땐 전통시장에 가서 한 그릇 사먹고 나온다. 새알은 좋아하지 않아서 늘 빼달라고 한다. 단호박 수프보단 노란 호박으로 만든 호박죽이 취향이다. 사먹기엔 전통시장 호박죽만한 게 없다. 호박죽과 단팥죽을 사 먹으러 가는 날은 심지어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러고 나면 호랑이 기운.이 내 안에서 솟아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렇게 또 여느 날을 살아간다. 옷깃을 여미고 자기 생.을 향해 나아간다.


작년 생일날 가족들과 식사를 하고 케이크에 초를 켰던 시간이 분명 엊그제 같은데 곧 생일이 돌아오고 있구나.싶은 것이. 생각하게 한다. 일년도 이토록 찰나구나. 어쩌면 작년 이맘때와 지금이 같은 시공간 동일선상에 놓여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것들과 찰나 속에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어떤 삶을 살 건가.하는 것들이 왕왕하게 내 안에서 피어오른다.


한참을 무기력하고 우울해 했던 때, 제주에서 며칠을 지내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공항에서 날 마중했던 엄마 생각이 난다. 서른 초반이었다. 엄마는 늘 밝고 호기롭고 씩씩하고 명랑하고 자신감 넘치던 딸이 정말이지 낯설었을 것이다. 그랬던 딸의 얼굴은 어두웠고 무기력해보였고 웃음을 잃은 아이가 되어있었으니. 마음 아팠을 엄마의 마음을 그 당시 나는 가늠할 수 없었다.


엄마도 은퇴하고 제주로 내려가신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제주에 와서 좀 쉬다 가라고 하셨다. 그렇게 엄마 집밥을 먹고 엄마와 드라이브하고 엄마와 해변을 거닐고 오름에 올랐던 나날들, 순간들. 좀 더 쉬어도 되건만 무언가를 해야한다는 불안감으로 곧장 서울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쉬면, 일하지 않으면, 손을 놓으면, 나 자신이 쓸모 없는 것 같은, 정말이지 잘못된 착각 속에 날 내동냉이 쳤던 시간들이었다.


그렇게 며칠만 보내고서 서울로 돌아가겠다는 딸에게 엄마는 아침밥까지 먹이고서 공항까지 바래다주셨다. 출국장에 들어가고 문이 닫히기 전 뒤를 돌아보았다. 엄마가 보이지 않아 고개를 내밀곤 사방을 둘러보았다. 나는 보았다. 행여 내가 볼까 기둥 뒤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는 엄마의 모습을.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나는 앞이 보이질 만큼 눈물을 쏟았다. 잊지 못할 그날이었다.


어릴적부터 늘 씩씩하게 살라.던 엄마의 말이 밀푀유처럼 켭켭이 쌓여 지금까지도 나에게 이토록 힘이 되었었구나.를 실감하고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나도, 어떤 상황에서도 씩씩하게 살면 되는 것이었다.


제주에서 귤이 왔다. 침대 위에서 냉장고에 넣어둔 차가운 귤을 까먹는 순간, 엄마의 진한 사랑.이 밀려왔다. "꼭 아이를 낳고 나서야 진짜 엄마의 마음을 알까? 알게 될까? 알 수 있을까? 영영 엄마의 마음을 모르고 가게 되면 어떡하지?"하는 불안감이 엄습할 때가 있다. 아직 철들려면 멀었다.싶을 때가 있다.


정말 감사해하기. 더 감사해하고 감사한 마음을 더 깊게 전해야지.

어머니가 내게 그랬던 것처럼.

내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방 안의 맹렬한 추위, 서늘한 공기에서 쏘아올려진 나의 사색과 사유는 결국 엄마의 사랑에로 닿았다. 그 어느 것 하나 연결되지 않은 것이 없다. 이 밤 엄마 생각을 했던 건 필연이었다. 내 마음이 제주에 있는 엄마에게 닿기를.


"사랑해요 엄마. 그리고 소녀 영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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