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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그네스 Dec 15. 2023

여기가 정녕 그때 그 런던이라고?

혼자 영국 런던 여행하기

    취미가 항공권 검색하기인 나는 저렴한 비행기 티켓을 본다면 언제든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실제로 내가 간 대부분의 여행지들은 이런 식으로 선택된 곳들이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항공권을 검색하던 중 사라고사에서 런던까지 왕복 4만 원짜리를 발견했다. 스페인에 산지도 한 달이 좀 넘어가던 시점이라 스페인 시골에서는 구경 조차 할 수 없었던 한식이 너무 그리웠던 나에게 유럽 최대도시 런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목적지였다.


    저렴한 비행기 값이 훼이크였던 건가. 숙소를 알아보는데 가격이 정말 살벌했다. 시내에서 30분~1시간 정도 차를 타고 나와야 하는 곳은 1박에 10만 원 미만으로 1인 숙소를 구할 수 있었고 시내에 있는 곳들은 1인실이 1박에 20만 원이 훌쩍 넘어갔다. 임박해서 예약하려고 하니 이미 예약이 마감된 곳들도 많았다. 결국 첫날은 시내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곳에 합리적인 가격으로 숙소를 구할 수 있었고 둘째 날부터는 1시간 정도 가야 하는 숙소를 예약했다.


    첫날에는 저녁이 다 되어서야 스텐스테드 공항에 도착을 해서 1시간 넘게 버스를 타고 시내로 갔다. 시골에서 출발해서 사라고사(2시간)까지 가고 또 사라고사에서 런던(3시간)까지 가서 런던 공항에서 런던 시내(2시간)까지 너무나도 긴 여정이었기 때문에 완전히 방전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바로 한식당을 찾았다. 한국에서는 김치찌개를 딱히 사 먹거나 자주 해 먹지 않는데 해외만 가면 김치찌개, 비빔밥이 왜 그리 먹고 싶은지 모르겠다. 어쨌든 시내에서 내려서 소호에 있는 한식당까지 걸어가는 길에 3년 만에 오는 런던 밤 풍경을 만끽했다.



    꼴값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데 (원래 그런 소리 많이 들음) 진짜 한 달 반 만에 느끼는 대도시의 풍경에 너무 감격해서 눈이 뒤집힐 뻔했다. 어쨌든 그렇게 김치찌개 한 그릇을 뚝딱하고 30분 정도 버스를 타고 숙소로 향했다. 런던 진짜 좋은 점, 교통카드 따로 발급받을 필요 없이 구글페이 결제하듯이 갖다 대면 됨. 3년 전에 갔을 땐 빅벤이 공사 중이어서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이번에 갔을 땐 공사가 끝나서 버스 타고 가는 길에 슬쩍 완공된 빅벤을 보고 눈물을 훔쳤다.


    내가 첫날 묵었던 숙소는 단독주택 가정집이었는데 방을 한 칸 빌려주는 곳이었다. 젊은 엄마랑 할머니 그리고 아기 이렇게 3대가 사는 집이었는데 젊은 엄마만 영어를 할 줄 아는 것 같았다. 아침에 체크 아웃을 하려고 그분을 찾는데 안 계시고 다른 방에서 아기랑 얘기하는 할머니 목소리가 들리길래 인기척을 냈더니 나와서 나를 보시고 엄청 당황하셨다. 영어를 못하셔서 '어.. 어..' 이러시길래 내가 스페인어로 말을 했다. (방에서 아기에게 스페인어로 얘기하시는 걸 들음) 그랬더니 무지 반가워하시면서 방은 괜찮았냐고 이것저것 말을 건네셨다. 그래서 나도 반갑게 인사하고 열쇠를 전달드린 후에 다시 시내로 향했다. 기분 좋은 시작이었다.


    나의 여행은 항상 철저하게 무계획형이다. 집을 나와서도 지도를 보지 않고 아빠에게 영상통화를 걸어서 런던을 보여주며 아무 곳으로 걸었다. 그렇게 1시간 정도를 걷다가 전화를 끊고 지도를 봤더니 시내에 꽤 가까워져 있었다. 30분 정도만 더 걸으면 시내가 나온다고 하길래 30분을 더 걸어갔다. (당시 스페인 집에서 학교가 버스는 없고 도보 40분이어서 30분 걷는 건 일상이었다.)



    빅벤이 나왔다. 하.. 진짜 밤에 볼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어서 저 주변을 한참 맴돌면서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왼쪽 검은 지붕 건물에 빅벤 기념품 샵이 있었는데 거기서 빅벤 사진이 무지하게 크게 박힌 카드 5장 묶음도 샀다. 다른 여행지였으면 날씨가 흐린 게 정말 아쉬웠을 텐데 런던은 너무나도 예상이 가능했기 때문에 (2차 꼴값 주의) 오히려 흐린 날씨마저도 런던의 낭만을 잔뜩 채워주었다. 그러고 나서 한식당에 갔다.


    런던을 간 아주 큰 목적 중 하나가 한식이었던 만큼 나는 3박 5일 동안 매 끼 한식만 먹었다. 한 끼도 예외 없이 정말 모든 끼를 한식당에 갔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한식을 먹으러 런던에 가냐면서 갑부의 삶이라고 했지만 난 진짜 안 그래도 삶에서 음식의 의미가 큰 사람인데 또 다른 나라 음식은 안 먹고 무조건 한식 파라 어쩔 수가 없었다. 김밥, 떡볶이, 튀김, 갈비탕, 김치찌개 같이 한식 중에서도 내가 해 먹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닌 것만 골라서 조졌다. (조리가 어렵거나 재료 수급이 어려운 음식들) 근데 좀 충격이었던 건 갈비탕이 4만 원이었다. 공깃밥은 별도이고 5천 원이었다. 떡볶이도 1인분에 만오천 원, 김밥은 한 줄에 만원이었다. 내가 진짜 동남아에서 부자처럼 살아본 적은 있어도 유럽 최대 물가를 자랑하는 곳에서 부자처럼 살게 되는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참고로 난 전혀 부자가 아니다. 이 정도면 내가 얼마나 한식에 미친 사람인지 증명이 된 것 같다.


    밥을 먹고 버스 터미널 안에 있는 스타벅스에 가려는데 길이 복잡해서 스타벅스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터미널 직원한테 물어보려고 익스큐즈미라고 말을 걸었다. 근데 그 직원이 날 보더니 '톨?'이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 이런 표정을 지었더니 또 '톨?'이랬다. 정말 난감했다. 내가 스페인어 못 알아듣는 건 익숙해도 영어는 분명 할 줄 알았는데.. 그래서 또 못 알아듣는 표정을 지었더니 스펠링으로 tour라고 불러주셨다. '투어'였다. 속으로 '아니 왜 토월이라고 안 하고 톨이래? 난 뭐 나 키 크다는 줄? 영국 발음 진짜 쉽지 않네'라고 생각하며 난 투어 참가자가 아니고 그냥 스타벅스를 찾고 있는 거라고 했다.


힘들게 찾아갔는데 펌킨 스파이스 진짜 무지 맛없었다


    그렇게 신나게 먹고 돌아다니다가 숙소를 갈 시간이 됐다. 어느새 해가 저물어가고 비도 내리기 시작했다. 근데 어김없이 문제가 생겼다. 보조배터리가 다 닳고 구글페이와 연결된 통장에 잔액이 부족했는데 현금도 없었다. 한국처럼 카페에 들어가 충전을 할 수도 없고 내 한국 카드는 터치식 결제를 지원하지 않았다. (유럽은 대부분 터치 결제이고 런던 버스도 터치식 결제만 지원한다.) 즉, 숙소에 가려면 버스를 타야 되는데 버스를 탈 수 있는 방법이 없는 상황. 어쨌든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IC 카드로 식당 결제는 되니까 한식당에 가서 치킨을 해치우고 카페에 가서 과제를 했다. 내가 다니는 대학교에서 준 공책을 쓰고 있었는데 카페 옆자리 아저씨가 말을 걸었다. 그 학교 다니냐고 나도 그 동네에서 왔다면서 반갑게 인사를 건네셨다. 스페인 분이셨던 것. 그래서 나도 반갑게 인사를 하고 조금 이야기를 나눴다. 나의 여행에는 이렇게 항상 군데군데 스페인이 녹아있다.ㅎㅎ


    근데 그렇게 과제를 하다 보니 더 어두워졌다. 그래서 그냥 에어 비앤비를 취소하고 시내에 있는 호텔에서 자는 건 어떨까 하고 호텔을 찾아봤더니 제일 싼 곳이 1인실이 1박에 30만 원이었다. 근데 갑자기 런던 뽕이 차올라서 부자 체험을 제대로 해보고 싶었는지 그냥 결제를 했다. 한국으로 치면 명동 한복판에 있는 호텔이었기 때문에 카페를 나와 바로 호텔로 가서 체크인을 했다. 진짜 그 순간만큼은 재벌이 부럽지 않았다.


    시내에 숙소를 잡은 자의 특권인 짐 두고 다시 나오기를 시전 했다. 어차피 밤이고 비가 와서 별 건 안 했는데 그냥 나와서 사람들 사이를 지나다니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3차 주의ㅋㅋㅋㅋㅋ) 메인 시내에서 살짝 벗어나 여기저기를 걸어 다니는데 발걸음이 닿는 곳마다 이 분위기와 공기마저도 너무 좋았다. 바람도 시원하고 그때 진짜 '돈을 많이 벌어서 런던에서 꼭 한 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호텔에 돌아와서 다음 날 일정에 대해 생각했다. 싼 항공권의 특징이 밤에 출발하고 현지에서는 아침에 출발한다는 건데 내가 딱 그랬다. 근데 런던 시내에서 공항이 워낙 멀어서 아침 비행기를 타려면 시내에서 출발하는 건 무리였다. 시내 숙박비가 저 모양인데 새벽에 나오긴 너무 아까웠고 그렇다고 시내에서 떨어져 있는 곳을 가자니 새벽에 공항버스 정류장까지 가는 교통편이 좋지 못했다. 그래서 그냥 전날 저녁에 미리 공항으로 가서 공항에서 차로 4분 거리 정도 되는 곳에 비교적 싼(15만 원) 호텔을 예약해 두고 거기서 자다가 새벽에 나와야겠다고 생각을 했다. 밤에 공항에 도착하는 것까진 무사히 완료를 했는데 공항에서 호텔로 갈 수가 없었다. 차로는 분명 4분인데 걸어서는 1시간 정도 걸리는 데다가 밤 10시 정도였고 버스는 없고 택시가 안 잡혔다. 4분 이동하는데 3만 원 정도였는데 내가 따불을 불렀는데도 택시가 안 잡혔다. (저기는 택시비가 워낙 비싸서 한국 3만 원이랑은 좀 개념이 달랐던 듯) 근데 난 포기가 빠른 편이다. 택시를 어느 정도 시도하다가 안 되길래 그냥 더 스트레스받지 말고 포기했다.


    15만 원짜리 호텔을 날리고 공항 노숙을 결정했다. 이것도 다 나중에 추억이 될 거라는 엄청난 정신승리를 했다. 꽤 여러 군데를 다녀봤지만 노숙 경험은 또 처음이었다. 특히 나는 잠귀가 밝아서 솔직히 잘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버거킹이 문을 닫을 때까지 죽 때리다가 문 닫고 나와서 한 창구 앞에 자리를 잡았다. 함께 노숙하는 사람들이 많아 외롭진 않았다. 가방과 함께 누워서 스페인에서는 안 떴던 드라마 '작은 아씨들'을 봤다. (잠귀는 밝지만 잘 눕는 편) 드라마 정주행을 하니까 시간이 훅 갔다. 새벽 4-5시쯤 되니까 사람들이 출근을 해서 나를 포함한 창구 앞 노숙자들에게 저리 가라고 했다. 그래서 저리 가서 또 떠돌았다. 그러다가 체크인할 시간이 돼서 공항에 가서 기다리는데 비행기가 연착됐다. 정말 진심으로 슬펐다. 근데 연착된 대가로 5파운드짜리 공항 편의점 바우처를 받았다. 그래서 편의점에 가서 프링글스를 사 먹으려는데 편의점에서 뭐가 문제가 있어서 바우처를 못 쓴단다. 진짜 너무 슬펐다. 그렇게 또 하염없이 비행기를 기다리다가 스페인에 돌아왔는데 진짜 마음이 착..... 놓이면서 진짜 너무 그냥 안심이 됐다.



    내가 제목을 저렇게 지은 이유는 3년 전 런던과 이번 런던이 나에게는 전혀 다른 여행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3년 전에는 가족이랑 갔던 데다가 나도 처음인데 가족들을 다 챙겨야 하는 입장이어서 내가 즐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번에 혼자 런던에 다시 가면서 100% 내 속도에 맞춰 런던을 즐기다 보니까 진짜 처음 오는 곳처럼 새롭게 느껴졌고 도시의 매력을 온전하게 느낄 수 있었다. 앞으로 여행 계획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부분을 미리 고려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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