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을 바쁘게 보내던 시절이 있었다. 한 겨울을 제외하고는 아침에 일어나는걸 그렇게 어려워하는 편이 아니다. 전날 술을 많이 마신게 아니라면 별 어려움 없이 일어나 하루 일과를 확인하고, 일주일 스케쥴을 본 후, 뉴스를 보다가 바로 일과를 시작하곤 했다. 언론의 수익구조가 바뀌면서 낚시성 기사가 양산되고, 뉴스를 읽는 것이 나에게 더이상 큰 도움이 안 되기 시작하면서 아침에 뉴스 보는 습관이 없어졌다. 일이 끊기면서 더이상 챙겨야할 일과가 없어지자, 아침이 무료해지기 시작했다. 어떤 하루를 보낼지에 대한 흥분은 없어지고, 어떻게 하루를 보내야할지 갑갑해지곤 했다. 그래서 시나리오를 아침에 쓰기 시작했다.
시나리오 측면에서만 보자면 아침은 브레인 스토밍 시간이다. 운동을 하든, 병원을 가든, 어떤 다른 일과를 하면서 시나리오 아이데이션을 한다. 시나리오는 보통 점심을 먹고난 후 커피를 마시면서 썼다. 도서관을 가기도 하고, 카페를 가기도 하는 등 외부에서 쓰는게 더 잘 써져서 우선 집 밖으로 나갔다. 아침 7시에 일어나는 생활을 하면서 아침을 글을 쓰자니 갈 수 있는 곳이 한정적이더라. 그래서 그냥 집에서 썼다. 정신이 맑아지자마자 마땅히 할 게 없으니 그냥 글이나 쓰자는 심산이었다.
그렇게 또 하나의 시나리오가 완성됐다. 오늘은 시나리오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글만 쓰고 싶어서 아침에 일어나 글만 썼다. 끝이 보이니 멈출 수 없었다. 처음으로 써본 공포 영화 시나리오는 재밌기도 했고, 그래서 걱정되기도 하다. 연출을 생각하면서 신나게 쓸 때를 제외하고는, 시나리오 쓰는게 재밌다면 내가 클리셰에 기대고 있다는 뜻일 수도 있으니까. 이번이 열번째 시나리오고, 이전에 쓴 아홉개의 시나리오 중에 팔린건 단 한 작품 뿜이다. 그러니 이번 작품도 팔릴 것을 기대하지 않는다. 그런 생각을 하면 시나리오가 잘 써진다. 어차피 팔리지도 않을거 클리셰든 뭐든 재밌게 쓰자, 이런 마인드랄까.
그렇다고 클리셰에 온전히 기댄 것은 아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요소들이 들어있는 시나리오다. 시놉시스를 들은 동료 감독들이 그 부분을 걱정할 정도로 새로움은 가지고 있는 시나리오다. 가만히 있으면 우울하고, 아침에 너무 무료해서 쓰기 시작해 생각보다 너무 일찍 끝나버렸다. 예전엔 다 쓰고 나면 전신의 힘이 빠지고, 몸져 누웠으며, 동시에 뿌듯함을 느꼈다. 완고를 내고 몸살 기운에 허덕이며 뿌듯해 하는 내 자신의 모습은 사뭇 웃기지 않았을까 싶다. 이젠 아프지 않다. 어떻게든 팔리는 시나리오를 써보겠다고 혼신의 힘을 다해가며, 밤을 새가며 쓰지 않아서 일까. 아니면 늙어가는 육신에 맞춰 힘을 잘 분배해서일까. 더이상 기대하지 않기 때문에 덜 힘을 써서일까. 뿌듯함은 없고 허탈함만 남았다.
나는 또 시나리오를 돌릴 것이고, 함께 하지 못하는 수만가지 이유를 들을 것이며, 이 시나리오는 또 내 컴퓨터 폴더에서 썩게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다음 시나리오를 준비할 것이다. 내년엔 영화를 그만두고 다른 일을 하기로 했으니 이번년도는 아무생각 말고 시나리오나 쓰자, 라고 준비한 아이템 두개를 모두 다 썼다. 2024년은 아직 두 달 반이 남았다. 열번째 시나리오가 마지막이 될 거라 생각했는데, 하나 더 써보려 한다. 팔리지 않더라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더라도. 달리 하고 싶은 것도 없으니.
이렇게 또 하나의 시나리오가 완성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