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jksmuseum Amsterdam
[이재] Riesener 내가 제일 좋아하는 가구 장인
엄마와 함께 쓰는 책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Rijksmuseum Amsterdam에 방문했을 때 어떤 것을 인상 깊게 봤었는지 기억을 되짚어보기 위해 사진첩을 뒤적여보다가, 2019년 여름에 찍었던 사진 중에 장 앙리 리제너 (Jean-Henri Riesener)가 제작한 책상을 발견하고는 많은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 이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리제너에 대해 알지 못하였는데, 몇 년 후의 나는 그의 업적에 대해 많은 조사를 하고 있는 직업을 가지고 있게 되었다.
내가 Sotheby’s에서 인턴을 시작했을 때 첫 번째로 받은 업무가 리제너가 제작한 Commode (프랑스어:코모드:서랍장)에 대한 조사였고, 인턴을 마치고 정직원이 되어서 다시 회사로 돌아왔을 때 가구팀에서 "네가 인턴 때 조사했던 그 Commode가 드디어 세일에 나온대"라는 말을 들었다. 나폴레옹의 가구를 조사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리제너의 가구를 세일룸에서 실제로 만났을 때, 너무 기뻤다.
독일 이민자였던 장 앙리 리제너 (1734-1806)는 독일태생의 가구 제작자인 장 프랑수아 외벤 (Jean-François Oeben, 1721-1763)과 함께 일하면서 파리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참고로 그는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 (Eugène Delacroix)의 외할아버지이다. 1760년 루이 15세는 베르사유궁의 서재에 들어갈 책상 제작을 외벤에게 의뢰한다. 하지만 외벤이 책상 제작을 끝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하게 되자 리제너가 제작을 이어받아 완성하여 1769년에 베르사유궁에 납품하게 된다.
이 책상은 왕실가구 관리부서 (Garde-Meuble)의 책임자인 Pierre-Elisabeth de Fontanieu의 관심을 끌었고, 이는 리제너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리제너는 1774년에 왕실가구 제작자로 정식으로 임명되며,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 등 왕실의 주요 인물들에게 많은 인기를 끌게 된다
리제너는 1774년부터 1785년까지 700여 점의 가구를 왕실에 납품했다. 내가 다뤘던 작품은 리제너가 1779년에 베르사유의 Philippe de Noailles 가문에 납품했던 Commode였다.
그러나 1784년 새로운 가구 관리 책임자로 Marc-Antoine Thierry de Ville-d’Avray가 임명되면서 그는 사치스러운 가구 지출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그래서 리제너의 화려하고 값비싼 가구는 더 이상 왕실로 납품될 수 없었고, 결국 리제너는 1785년에 왕실가구 제작자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리제너의 말년에 그의 가구는 영국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기간 동안 리제너의 작품이 대거 시장에 나오자 혁명 정부는 그의 가구가 해외로 반출되지 못하도록 보호조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많은 작품이 영국의 수집가들에게 넘어갔다. 이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던 조지 4세 (1762-1830)는 해외 출국이 금지되어 파리에서 열리는 경매에 참여할 수 없게 되자 친구들과 딜러에게 부탁해서 리제너의 작품을 구매했다고 한다.
그동안 우리가 박물관에서 봐오던 럭셔리한 프랑스 가구의 대부분이 리제너의 가구이거나 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보면 된다. 그의 가구 스타일은 독일 영국 등으로 퍼져나갔고, 현대 가구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