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윤 Jan 04. 2024

바로 여기 있었답니다. 오래 전부터.

[2기-01] 파닥파닥 해바라기 - 존재 인식 

파닥파닥 해바라기 / 보람 / 길벗어린이


모르던 존재를 알아차리고 수용하는 과정이 담긴 그림책입니다. 작은 해바라기는 큰 해바라기들 틈에서 꿋꿋이 살아갑니다. 자신보다 몇 배는 키가 큰 해바라기들 틈으로 햇빛을 받기도, 물을 마시기도 힘들지만요. 어느 날, 작은 해바라기는 꿀벌의 조언을 받아 잎사귀를 파닥파닥거려 날기를 시도합니다! 파닥파닥파닥!! 날갯짓과도 비슷한 그 소리에 주변의 큰 해바라기들은 파닥 거림을 알아차리고 자리를 만들어줍니다. 작은 해바라기는 넓어진 공간에서 햇볕도 물도 양껏 받으며 무럭무럭 성장하고 큰 해바라기만큼 커진답니다. 



     발견과 연대


세상에는 참 많은 존재가 있습니다. 인간은 인종, 국가, 종교 등으로 동식물은 살아가는 환경, 크기, 모양, 색깔 등으로 더 세분화할 수 있겠죠. 다양한 유형의 생물이 이 지구에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들을 다 알고 있나요? 너무 많다구요. 그럼 같은 인간으로 한정한다면요? 각각의 인간들은 어떤 점이 비슷하고 어떤 점이 다른지, 어디에 존재하는지 인지하고 있나요? 그 외 동식물까지는 가지도 않겠습니다.   


사람들은 자신과 다른 존재를 얼마나 인식하고 있을까요. 주변에 나와, 우리(라고 생각하는)와 다른 누군가가 있음을 인지하고 있나요? 그들은 나와 어떤 부분이 다르던가요? 생김새? 성격? 취향? 발달 상태? 그 다름을 알고 나서 여러분은 어떻게 행동했나요? 반가이 맞아주었나요 모른 척 고개를 돌렸나요?  집단에 소속될 수 있도록 도움을 준 이가 있었나요? 어떤 도움을 주고 어떤 영향을 미쳤나요?




저는 특수교사이지만 장애인을 인식하고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때입니다. 그전에는 제 삶에 '장애인'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가끔 길에서 장애인을 보는 게 전부였고 그들을 나와는 '다른' 집단으로 여겼거든요. 무지나 무관심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선긋기'가 더 적절한 표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나와 섞일 수 있을 거라 단 한 번도 상상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고3, 특수학교로 나간 봉사에서 처음으로 장애인과 소통이란 것을 해보았습니다. 그리고 깜짝 놀랐습니다. 생각보다 너무 즐거워서요. 왜 그들이 우리를 그리 반겨주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만나고 싶었습니다. 꿈이 없던 그 시절, 대학도 가지 않겠다 선언했던 저에게 무려 관심사라는 것이 생겨났습니다. 계속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장애인과 관련된 학과를 찾다 보니 특수교육이 나오더군요. 그렇게 처음으로 제 전공을 접했습니다.


큰 해바라기는 그 시절의 저를 떠오르게 합니다. 존재하는지도 몰랐고 알아차려도 관심 가지지 않던 과거의 저를요. 그래서 작은 해바라기가 더 신경이 쓰였나 봅니다. 나의 무지와 무관심으로 다른 해바라기들과 똑같이 받아야 할 햇빛과 물을 받지 못한 초록 잎을 가진 자그마한 꽃을, 오래전부터 그 자리를 꿋꿋이 지킨 해바라기를.   





이 책을 한 단어로 표현한다면 '발견', '연대'라는 말이 떠오릅니다. 협동, 성장, 친구 등을 말할 수도 있겠네요. 작은 해바라기의 크기를 보면 어릴 것 같지만 생각보다 나이가 들었을 수도 있습니다. 영양분이 충분치 않아 성장이 더딘 것일 수도 있죠. 꿀벌과의 대화나 혼자 생각하는 것을 보면 세상에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기 같아 보이진 않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을 혼자 보냈을까요. 큰 해바라기들이 자신을 '발견'했을 때 얼마나 기뻤을까요. 나에게 용기를 준 꿀벌이나 나비에게는 물론 고마웠겠지만 같은 해바라기들과 연대하게 되어 가슴 벅차지 않았을까요. 


인간은 같은 부류와 연대합니다. 국가, 인종, 종교, 성별, 지역, 장애, 직업, 관심사.. 그 유형은 끝도 없이 펼쳐지죠. 우리는 모두 그 이유를 느낍니다. 비슷하기 때문에 공감대가 형성되고, 한 집단 안에서 편안함을 느끼며, 같은 목표를 향하니까요. 그 안에서 약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나와 무언가가 같은 이는 분명 탁 하면 척 아는 느낌이 통하기 마련입니다. 같은 국가 국민으로서 힘듦을 공유하고, 같은 종교인으로서 가치관이 비슷하며, 같은 직업군이기에 고난과 장점을 함께 겪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것을 우리는 분명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삶에 있어서 '연대'는 필요충분조건이라고도 볼 수 있겠네요.



나는 4명 중 이효리를 맡았다


연대는 거창하지 않습니다. 사회운동 정도는 돼야 느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말이지요. 저는 어린 시절 친구들 3명과 함께 핑클 춤을 췄습니다. 4명의 멤버들을 한 명씩 맡아 집에서 '영원한 사랑, 'Now' 등을 연습했고 수련회에서 장기자랑도 했습니다. 우리 4명이 마치 세일러문이나 웨딩피치 패거리 정도는 되는 양 느꼈다면 너무 오버일까요. 하지만 저는 그때 분명 우리가 하나 됨을 느꼈습니다. 친구들과 재밌는 것을 함께 하고, 우리에게 꼭 필요한 '놀이'를 같이 했으니까요. 아주 순수한 연대였다 자부합니다. 이처럼 연대는 내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주고 웃음과 자신감으로 우리를 무장시킵니다. 그래서 누구나 느껴야 할 감정이라 생각하지요. 



     도전과 격려



작은 해바라기가 파닥거릴 수 있던 이유는 꿀벌 덕분이기도 합니다. 꿈에서 꿀벌은 파닥이에게 잎사귀를 파닥거려 날아보는 것을 제안합니다. 주변에 꿀벌 같은 사람이 많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무모해 보이더라도 방법을 찾아주고 도전을 격려하는 이 말이에요. 


나중에 파닥임을 알아차리고 자리를 내어 준 큰 해바라기들도 있습니다. 여기서 이런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과연 이전에 작은 해바라기를 알아차린 큰 해바라기가 없었을까? 무지였을까, 무관심이었을까. 하지만 과거가 어떤들 현재의 큰 해바라기는 달랐습니다. 바라보고, 손을 내밀었죠. 이런 꿀벌과 큰 해바라기에 지금의 제 모습이 비치기도 합니다. '선긋기'를 하던 제가 변화한 것처럼 다른 사람들도 변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지금은 고3 이전의 저와 같은 모습이더라도요.


통합학급 아이들을 보면 참 다양합니다. 특수학생들을 좋아하고 같이 놀고 싶어 하는 아이, 싫어하는 아이, 별 관심 없는 아이. 그런데 그 태도의 변화를 보는 것도 흥미로워요. 처음엔 특수 학생이 있거나 말거나, 혹은 대놓고 '나는 쟤가 왜 저러는지 모르겠어요.', '쟤는 이상해요.'라고 말하던 아이가 어느 순간 말을 걸고, 장난을 치고, 쉬는 시간에 같이 놀게 될 때 '역시 아직 아이라서 빨리 받아들이는구나'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체육처럼 신체 활동이 많은 시간에는 'OO아, 이렇게 해봐, 나 따라 해 봐, 선생님이 말하면 뛰어!'라고 저보다 더 잘 알려주는 '친구'가 되기도 하지요. 친구의 응원에 특수학생들은 웃으며 기꺼이 도전합니다.  



     초록, 설익은 존재



작가는 작은 해바라기의 설익은 존재를 표현하고자 꽃잎 하나를 초록으로 칠했습니다. 그 자체의 부족함보다는 필요한 것을 충분히 받지 못함을 나타낸 것으로 보이는데요. 이 초록잎을 보며 지금껏 제가 만나온, 주변에서 들려온 특수 학생들이 생각났습니다. 

특수학교가 너무 적고 멀어 가지 못하는, 

집 주변에 특수학급이 없거나 정원이 다 차서 차로 한참을 가야 하는, 

학급 당 적정 학생수를 초과하여 교사 한 명이 많은 학생들을 가르치느라 학습권이 보장되지 않는,

학교라는 울타리를 벗어난 후에는 집에서만 생활하는,

일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장애인이기에 일자리를 얻을 수 없는,

그런 현실이요. 


우리 사회는 장애인의 삶의 질까지 고려하기엔 너무 벅찬 걸까요. 학교나 기업 등에서 장애인과 함께 하기를 고려하려면 많은 노력이 수반됩니다. 특수교육, 통합교육, 장애인 고용 및 복지 등 관련 법과 제도가 마련되어야 하고, 사람들의 인식도 개선해야 하며 이를 운영할 비용이 필요하죠. 그런데 이를 불필요한 것이나 낭비로 보는 눈이 아직 많습니다. '장애인'하면 '중증 지적장애나 자폐성장애'를 가장 먼저 떠올리며 마치 다른 장애인을 다 아우르는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보면 아쉽기도 합니다. 장애의 유형과 정도는 여러분이 아는 것보다 더 다양한데 말이죠(중증 발달장애인에 대해서는 많은 고민이 필요하긴 합니다. 절대 쉽지 않은 영역이니까요). 


저는 초록의 설익음이 사람의 '부족함'보다는 먼저 '환경'의 문제로 인식되기를 바랍니다. 당사자의 한 특성일 수도 있겠지만 변화될 수 있는 설익음이라면 그 방법을 함께 고민하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요. 작은 해바라기의 문제는 '작음'이 아니라 '부족했던 해, 물, 바람'이었던 것처럼요.   




두 번째 파트 첫 시작은 장애인이 존재하고 있음을 인식하기 위해 '파닥파닥 해바라기' 소개했습니다. 인식에 있어 중요한 것은 내가 의식을 가지고 스스로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본인에게 질문을 던져보게 하는 것이 목표였는데 어떠셨나요. 모르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질문하기보다는 나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들여다보셨기를 바랍니다. 변화는 스스로의 생각으로부터 시작되니까요.  

작은 해바라기를 발견했을 때, 큰 해바라기들이 조금씩 비켜주었던 것처럼 우리도 이와 같은 사람을 마주했을 때 상대방이 더 자랄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조금은 실천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합니다.
내가 누군가의 걸림돌이 아닌지, 함께 누려야 할 것을 소유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돌아보면 어떨까요.
 


https://www.youtube.com/watch?v=zv0O57KGXHE&t=42s



매거진의 이전글 장애인과의 공존은 한 번 하고 끝나는 이벤트가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