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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연 양윤희 Oct 01. 2023

마른 남자와 살찐 여자의 로맨스

로버트 쿠버의  <요술부지깽이>에서


                                             마른 남자와 살찐 여자의 로맨스


      찰스 다윈은 세기를 발칵 뒤집어 놓은 걸작 『종의 기원』에서 모든 생명체들이 하나의 원조에서 진화되어 나온 것이라는 논의를 폄으로써 수많은 종교 철학자, 사회 과학자들의 밀물 같은 조롱과 멸시를 받았다. 그가 이런 논의를 편 이유는 갈라파고스 섬을 항해하던 중 수많은 핀치 새들의 부리 모양이 환경에 따라 조금씩 다르다는 것을 관찰하고 나서였다. 같은 종의 핀치 새가 섬에 사느냐 육지에 사느냐에 따라, 혹은 주변에 딱딱한 나무들이 많은지 무른 나무들이 많은 지에 따라 부리의 생김새가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환경이 몸의 상태를 결정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자연선택설”이라고 이름 붙이고 모든 생명체가 결국은 자연 현상의 영향에 따라 존재론적 위상이 결정된다는 거대 이론을 끄집어낸다. 사실 다윈이 그의 저서에서 ‘진화’라는 말을 먼저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는 이 단어를 쓰는데 매우 신중했고 ‘진화’라는 용어는 그의 후배 과학자들이 그의 논의를 일반화시키기 위해 차용한 용어였다. 다윈은 ‘진화’라는 말 대신에 ‘변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어떤 환경에서 다른 환경으로 변화함에 따라, 어떤 형질이 다른 형질로 변화한다는 뜻이다. 진화라는 용어는 어찌 보면 무언가 더 상위버전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지도 모른다. 물리학에서는 정보가 많은 것을 상위버전이라고 한다. 단순한 것일수록 하위버전에 속하고 더 세분화되고 복잡 미묘한 성향이 혼재하여 정체 파악에 많은 정보가 필요한 체계일수록 상위버전이라 일컫는다. 하지만 이 상위버전도 결국엔 그보다 더 세분화된 다른 체제에 영향을 받게 되니 다윈이 왜 ‘진화’라는 말 대신 ‘변이’라는 말을 사용했는지 이해가 될 만하다. 

     자연환경과 삶이 수많은 정보에 의해 침식당하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더 빨리 변이 하여 더 빨리 진화한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들기 위해 환경과 끊임없이 조율하고 타협할 수밖에 없다. 그들의 진화적 적응(evolutionary adaptation)은 육체적 신체적 조건에만 해당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상응하다. 인간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유지하기 위해 사유도 진화시킨다는 뜻이다. 인간의 사유가 진화되듯 사랑도 진화한다. 본 비평은 사랑에 대한 담론을 다윈의 진화적 관점, 루만의 사회학적 관점, 알렉산더 웬트의 양자 물리학적 관점으로 성찰해 보는 것이다. 왜 인간은 사랑하면서도 행복하지 않은가, 사랑에 대한 감정은 왜 변하는가, 사랑은 미래에 어떤 방식으로 진화할 것인가. 



                                                                       *          *         *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의 거장 로버트 쿠버의 단편 소설 『마른 남자와 살찐 여자의 로맨스』를 읽으면 마치 사랑에 관한 비참한 천기누설을 들은 것처럼 숙연해지고 씁쓸해진다. 이 소설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사랑에 관한 말하기 힘든 진실을 서커스를 배경으로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쿠버는 우리들의 사랑이 상상과 실재가 전도되고 목표와 목적이 일치되지 않는 비틀어진 영역임을 소설의 첫 부분에 밝힌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으레 살찐 남자와 마른 여자의 사랑을 상상할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다. 마른 남자와 살찐 여자의 계속되는 짝짓기는 서커스에나 있는 전설적 진리하고 여길 테지만 사실 솔직히 고백하자면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사랑은 다름 아닌 그런 우스꽝스러운 로맨스이다. 우리는 모두 마른 남자들이고 당신들은 모두 살찐 숙녀들이다"(민음사, 요술부지깽이, 190)        



쿠버에 의하면 근육이 단단하고 힘센 남자와 가냘프고 여리여리 한 아름다운 여자의 사랑은 상상 속에만 있는 허구이다. 현실은 그렇지 않다. 왜일까?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일인칭으로만 설명할 수 있는 둘 만의 감각적 영역이다. 그런데 사랑이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설’처럼 주변 환경에 의해 선택당한다. 인간의 의식과 사회적 삶은 궁극적으로 자연과 물질 현상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서커스 단원인 마른 남자와 살찐 여자는 둘이 사랑에 빠지자마자 자신의 상징인 ‘깡마름’과 ‘풍만함’을 부끄럽게 여긴다. 서로를 사랑할수록 마른 남자는 근육을 키워 단단해지려 하고 살찐 여자는 살을 빼서 연약해지고자 한다. 이러한 그들의 바람은 서커스의 이익에는 중대한 손실을 가져오는 반역이 된다. 관객들이 원하는 것은 전형적으로 깡마른 남자와 살이 부풀어 오른 여자인 것이다. 그들이 서로에게 집착하여 사랑에 빠지면 빠질수록 서커스 관객은 줄어든다. 이들의 예기치 못한 연정으로 수입이 줄어들자 서커스 단장은 살찐 여자를 다른 서커스단에 팔아먹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단원들은 단장의 음모가 비인간적이라고 판단하여 서커스 단장을 죽이고 마른 남자와 살찐 여자를 서커스 공동 대표로 취임시킨다. 처음엔 사랑을 지키려는 그들의 로맨틱한 혁명이 서커스에 활기를 불어넣었다     

몇 주 동안 서커스에는 즐거움만 가득했다. 모든 공연은 파티로 끝났다. 두 연인의 행복은 매혹적인 빛을 발하며 새로운 수많은 관객들을 매료시켰고 논쟁거리는 모두 그들의 행복에 관한 것이었다. 정말 천국이 따로 없었다. 마른 남자는 아무 양심의 가책 없이 운동을 해서 금방 탄탄한 이두박근을 갖게 되었다. 살찐 여자는 너무 흥분한 나머지 칼로리 차트를 마른 남자와 바꾸는 바람에 일주일도 안 돼서 살이 쏙 빠졌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더 이상 자신들이 지배하는 서커스 본연의 흑백 진리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어딘가 다른 서커스단에 분명 더 살찐 숙녀나 더 마른 남자가 있을 것이기에 그들의 새로운 세계는 붕괴되기에 이른 것이다. 관객이 점점 줄어가자  마른 남자는 이익에 목숨을 걸었던 전 서커스 단장을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한다. 사랑은 슬슬 빠져나가고 서커스단을 유지해야 한다는 생존 본능만이 압도적으로 정신을 장악한다. 이제 사랑은 변한 환경의 경제적인 삶 본능에 굴복한다.      

“왜 그들은 단지 그들 자신만을 위해서 사랑할 수 없는 거지?”

“서커스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라고, 우리가 말했어.”(민음사, 요술부지깽이, 197)     



그들은 이제 상대를 더 살찌우고 마르게 하려고 서로를 감시하며 싸운다. 바로 이 부분이 다윈이 말한 ‘자연선택’이 되는 부분이다. 마른 남자가 단원에서 단장으로 바뀌는 순간 그들의 성적욕망은 생존욕망으로 변이 된다. 서커스 전체를 운영해야 하는 단장이라는 상황이 그를 야비한 성격으로 진화시킨 것이다. 작가는 이 부분에서 의미심장한 사랑에 관한 진리를 털어놓는다.      

      


그 당시 서커스 단장이 철학자였다면 그는 파국을 피했을지도 모른다 – 왜냐하면 모든 진정한 로맨스는 정말 진실할수록 반드시 파국이 있기 마련이니까. 그는 단지 엉터리 삼단 논법으로라도 그 커플을 확신시킬 수 있었다 – 정말 바로 그 모순으로!-그들 각자의 소원대로 말이야(193).     



작가는 서술자의 목소리를 빌어 사랑이란 진실되면 될수록 반드시 파국에 이르는 것임으로 전 서커스 단장이 이 두 사람의 사랑을 방해하지 않아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레 해결이 됐을 거라고 말한다. 서커스 단장이 철학적 사유가 있는 자였다면 '사랑이란 진실하지 않으면 진실하지 않아서 끝이 나고, 진실되면 진실돼서 끝난다는 것'을 잘 알 것이기에 그 둘을 미리 떼어 놓으려 음모를 부리지 않았을 거라는 것이다. ‘진실하다’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환경과 자신을 빈틈없이 결합시킨다는 뜻이다. 그런데 사랑이란 결국 타자를 위하여 자신을 조율하는 것이니 그로 인해 새로운 상황이 전개되고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다시 변화한 환경이 주체에게 영향을 주어 변이가 발생함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제1상황: 서커스단-- 사랑에 빠진 마른 남자와 살찐 여자

 제2상황: 둘 만의 텐트--사랑의 쾌락에 종속되기 위해 각자의 소임을 배반

 제3상황: 서커스단장이라는 권력—이전 서커스단장이 둘을 떼어 놓으려 하자  그를 거세하고 직접 서커                수단을 운영하려 함

 제4상황: 서커스단의 재정적 위기—결국 마른 남자는 사랑을 배반하고 살찐  여자를 옆 서커스단에 팔아넘김                    

   

    이 두 사람은 사랑을 얻기 위해 진실에 기반하여 행동을 하지만 상황은 늘 그들의 예상을 비켜가고 사랑을 따라 간 경로의 끝은 ‘사랑의 파국’이라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국 사랑의 욕망이 주변 환경을 변화시키고, 환경은 다시 주체를 변화시켜 사랑이 끝나는 것이다. 로버트 쿠버는 이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이상한 사랑의 경로를 다음과 같은 말로 통렬히 비꼰다.     


하지만 기다려라!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쳤는지 보라! 살찐 숙녀는 결코 뗄 수 없는 사이인 마른 남자와 헤어졌다! 결론은, 모든 마른 남자의 찬탄할만한 의지는, 반드시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서커스단에는 즐거움이 없다는 진리이다(202).     



여기서 서커스단은 바로 우리의 삶을 풍자한 것이다. 사랑은 진실을 추구할수록 파국에 이른다. 마른 남자의 찬탄할 만한 의지! 서커스 단장을 죽이면서 까지 지키려던 사랑은 결국 세속적인 이유로 허물어진다. 새로운 과학 이론이 기존의 과학 이론을 붕괴시키는 것처럼 연애도 시간에 따라 관념적인 진화를 한다과거의 사랑 방식은 진부해지고 미래에 도래할 사랑은 과학적 진화와 연결되어 있다. 찰스 다윈은 동물의 “짝짓기”에서 삶 본능 보다 성본능이 앞선다는 것을 밝혀냈다. 그러나 처음의 ‘성본능’이 그다음엔 다시 ‘생존 본능’으로 변이 되는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이에 반해 니콜라스 루만은 “사랑”이 시대에 따라 다르게 진화하는 “상호 침투”의 진화적 장르라고 설명한다. 니콜라스 루만에게 시대적 배경은 찰스 다윈에게는 자연환경에 해당한다. 환경이 변하면 생명체의 모습이 바뀌듯 시대가 바뀌면 사랑도 변화한다. 사랑을 환경과 시간에 따라 달리 바라보고 그것의 진화 과정을 파악하는 것도 자못 흥미롭다. 니콜라스 루만의 「사회 진화론」으로 보면 원시 시대에는 “사랑”이 집단들 가운데 무작위로 행해지는 짝짓기였다. 이때의 파트너는 생물학적 선호에 의해 결정되었을 것이다. 고대와 중세로 넘어오며 사랑은 고귀한 귀부인을 저 높은 곳의 별처럼 숭앙하고 충성과 서약을 바치는 궁정풍 사랑이 우세한다. 열정을 퍼부을 대상을 현실에서 마음대로 만날 수 없으니 상상의 연인에게 사랑을 바치는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거쳐 계몽주의가 확산되고 여성의 지위가 어느 정도 인정되자 사랑은 ‘열정에 의한 눈 맞음’으로 변형된다. 사랑으로 쾌락을 얻고자 하는 자유가 허락된 것이다. 근대로 오자 사랑은 결혼의 도구가 된다. 결혼하기 위해서 사랑은 필요조건이 되었다. 그러나 자본주의로 넘어오며 가정이 경제체제를 실현해야 하는 이익 집단이 되자 사랑은 더 이상 낭만이 아닌 그저 그런 사회적 계약 관계로 전락한다. 처음엔 사회에서 개인에게로 독립되었던 사랑이 자본주의의 이익추구와 결탁되자 다시 사회체제로 귀속된 것이다. 사랑은 결혼을 사칭한 자본이 되고 ‘불륜’이나 ‘혼외 사랑’, ‘단기적 짝짓기’ 같은 비정상적 탈선이 개인의 은밀한 낭만적 장이 된다. 

      이것을 알렉산더 웬트의 양자 이론(Quantum theory)과 연결해 보자. 고전주의 물리학에서 물질은 자신의 운동 값이 항상 일정하게 정해지고 질량보존의 법칙이 우선한다. 물질의 상태는 외부의 압력이 없다면 변화되지 않는다. 이런 가설로 보면 사랑도 변화될 수 없다. 외부의 간섭이 없다면 그 열정은 꾸준히 존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근대의 상대성 이론 시대가 오면 물질 에너지는 시간과 속도의 영향을 받는다. 마치 고전적 사랑이 근대로 오며 환경의 영향을 받듯 사랑도 과학 이론에 따라 진화한다. 상대성 이론으로 보면 사랑은 속도에 비례하여 열정의 양이 결정된다. 갑자기 사랑에 빠질수록, 첫눈에 반할수록 더 뜨겁다. 그러나 시간이 가면 사랑은 식게 된다. 현대로 오면 물질의 운동 방향이나 그 분화 과정이 시 공간을 예측할 수 없이 비국소적으로 퍼진다는 양자역학이 가세한다. 시간은 작위적으로 구성되고 과거도 현재를 기준으로 조작될 수 있다. 게다가 물질은 주변 물질의 파동 함수에 영향을 받아 붕괴하기도 한다. 사랑의 최초 감정, 원래의 약속은 지금 현 상태의 기분에 의해 해석의 문제가 된다. 현재에 의해 과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상황에 따른 ‘감정의 붕괴’가 사랑의 윤리학에 적용되기에 이른다. 이는 상당히 흥미로운 이론이다.

       최근에 마음까지도 물리학적 현상으로 파악하는 양자 역학적 해석이 관심을 받게 된다. 인간을 걸어 다니는 파동 함수(walking wave function)라고 논의하며 마음의 본질이 물질의 본질과 같다는 주장이다. 의식(consciousness)이라 불리는 정신적 삶과, 제도(institution)라는 사회적 삶은 거시적 양자역학 현상이다. 고전물리학에서는 수학의 상징물들이 실제 물질 대상의 역학적 속성에 상응하는데 반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이것들이 측정될 때 잠시 어떤 속성의 가능성으로만 나타난다. 알렉산더 웬트에 따르면 과거 경험도 마치 물질을 측정하듯 현재의 선택에 따라 행위의 성격이 바뀌는 불확정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과거는 사실이 아니라 창작이라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변하면 과거도 변한다는 이 깜짝 놀랄만한 이론은 “사랑”이 변질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큰 효용이 있다.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이 한때 열정의 순간이 존재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 감정상의 파장이 일지 않는다. 고전물리학 이론으로 보자면 한 번 불타오른 사랑은 꾸준히 지속되어야 하지만 양자물리학으로 보면 변심은 당연하다. 과학적 진보가 “사랑”을 다루는 관점에 이용될 수 있는 것이다. 양자물리학적 관점에서 “사랑”은 다양한 내러티브로 구성되는 결맞음 현상이기에 보는 이의 시각에 따라 다른 장르를 형성할 수 있고 상태 함수에 따라 급격히 붕괴되는 하나의 파동이 될 수도 있다.

        이것을 다시 마른 남자와 살찐 여자의 로맨스에 대입해 보자.     



“초콜릿! 나한테? 정말 오랜만이네요!”

“사랑을 담아서 주는 거요.”

“하지만 당신이 보는 바로 이 모습처럼, 내가 다시 살이 쪄도 나를 정말 다시 사랑할 수 있겠어요?”

“솔직히 내 사랑, 내겐 차이가 없소.”(198)


      마른 남자는 서커스의 매출이 줄어들자 다시 살찐 여자를 예전의 살찐 상태로 만들기 위해 초콜릿을 준다. 그러니 이 초콜릿은 사랑의 증표가 아니라 살을 찌우기 위한 당분이다. 살찐 여자는 마른 남자의 선물을 예전과 같은 사랑의 증표로 받아들이고 싶지만 마른 남자의 “솔직히 내 사랑, 나에겐 차이가 없소.”라는 말이 이제 이 둘 사이에 성적인 매력 따위는 아무 관심이 없는 것이 되었음을 암시한다. 똑같은 초콜릿이지만 상태 함수가 변한 것이다. 이제 둘의 사랑은 더 이상 내포적인 상호침투의 소통의 장이 아님이 드러난다. 사랑의 소통은 두 사람만의 환상의 영역인데 여기에 물질적인 경제적 영역이 침투한 것이다.

       찰스 다윈에 의하면 우리의 성적 욕망은 다른 욕망들과 비슷하게 선호에 의해 진행된다. 누군가를 더 좋아하고 어떤 상태를 더 즐기고자 하는 바람이 성적 욕망인 것이다. 그런데 “내 사랑, 나에겐 차이가 없소.”라는 말은 이미 살찐 여자가 선호의 대상이 아니라는 뜻이다. 배우자에 대한 욕망은 생존 본능과 유사한 것은 아니지만 삶을 식욕에 대입해 볼 때 연애 본능도 어쩌면 개개인의 삶의 욕망에 지배당할지 모른다는 유추를 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은 때로는 일시적인 방탕, 스쳐 지나가는 밀회, 짧은 혼외정사를 간절히 추구하곤 하지만 결과적으로 자신의 생존에 위험이 되는 상황은 회피하게 된다. 마치 화려하고 맛있게 생긴 열매라도 독이 있다는 것을 알면 외면하듯 말이다. 

        마른 남자는 자신이 아무리 부탁을 해도 예전처럼 살찌는 것에 성공하지 못하는 살찐 여자를 옆 서커스단에 팔아 버리기로 결심한다. 사랑을 버리는 것이다. 그는 서커스 단장이라는 위치와 살찐 여자의 애인이라는 이중생활을 조율할 수 없다. 환경이 사랑을 압도해 선택된다.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이다. 이런 상황을 쿠버는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자, 우리 인정하도록 하자. 어쩌면 타락한 것은 우리 자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수많은 서커스 단장을 보았고 바로 우리 자신이 그가 돼 보기도 했으며, 수많은 퍼레이드를 관람하면서, 편안하게 앉아 넘치는 스릴을 맛보고, 수많은 책들도 죽 훑어보았다. 이미 우리는 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단순한 세상 속에서 단순함의 묘미를 잃어버린 게 분명하다...... 이 마법적인 은유는 서커스에만 국한되는 서커스만의 문제가 아니라 가장 곰팡내 나는 거리에서 빌려온 삶에 관한 것이다(205).     



마법적인 은유란 무엇일까? 인간은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한 일원, 생물학적으로 섭생을 해야 하는 물질적 존재로 살아간다. 현실의 껍데기는 속임수로 가득 차 있고 영혼과 육체가 이중으로 분리되어 진실이란 비밀스러운 관계 속에서만 진행되는 이상한 세계에 말이다. 두 사람은 도둑처럼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만날 수밖에 없으나 둘의 사랑이 체중을 변화시켜 현실의 껍데기를 온전히 유지하지 못하게 하니 세간의 잣대로 보면 서로를 망치는 사랑이다. 배반은 자연스러운 수순인 것이다.

     니클라스 루만은 그의 책 『열정으로서의 사랑』에서 연인들 사이의 희망은 현실과의 비교를 통해 해체가 가속화된다고 언급한다. 현실은 서로를 상징으로 보는 은유의 세계에서만 온전히 지탱된다. 그러나 사랑 때문에 은유가 깨지고 상징을 잃게 되면 그들의 관계는 고유의 시간성을 따라잡지 못해 붕괴되고 만다. 다가올 서커스단의 붕괴라는 현실은 마른 남자와 살찐 여자의 사랑을 완전히 파괴해 버린 것이다. 쿠버는 두 사람의 현재 열정이 미래의 시간이라는 비용으로 양자 물리학에서 물질의 붕괴처럼 아무 의미도 없을 거라는 것을 밝힌다.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많은 것들을 잃었고, 지금도 잃는 중이고, 아직 더 많이 잃어야만 할 것이다. 마른 남자가 나이가 들어 등이 굽으면, 살찐 여자는 쭈글쭈글 해져서 죽을 것이다.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다. 가장 단순한 진리(205)      

  


시간의 잠식을 통해 사랑은 자기 자신을 파괴한다. 상상의 날개를 달아 주었던 사랑의 속성은 녹아 없어지고, 기쁨은 익숙함으로 대체된다. 대단한 미인도 전보다 덜 예뻐 보이고 추남도 전보다 봐줄 만하다. 실재에서 상상으로의 코드 전환이 시간적 부식에 노출되어 역 방향으로 진행되는 것이다. 역 방향의 진화이다. 사랑을 이상화하고 신비화하는 문학적 표현들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당시 사회와 그 변화 추세에 반응한다. 사랑은 상호 보편적이며 삶의 모든 상황에서 상대를 계속 고려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그런데 서로를 이해하는 사랑이 시간이 지나자 현실과 조율하기엔 너무 피곤한 일이 된다. 차라리 서로를 이해시키느니 감정의 불안정을 감수하는 편이 더 쉽다. 

    역 방향의 진화에 대해 생각해 보자. 고전물리학에서는 수학의 상징물들이 실재 물질 대상의 역학적 속성에 상응하는데 반해 양자물리학에서는 이것들이 측정될 때 잠시 어떤 속성의 가능성으로만 나타난다. 알렉산더 웬트에 따르면 과거 경험도 마치 물질을 측정하듯 현재의 측정에 의해 행위의 성격이 바뀌는 불확정적이고 가변적인 것이다. 시간과 공간이 변하면 과거도 변한다는 이 깜짝 놀랄만한 이론은 “사랑”이 해석할 수 없는 방향으로 변질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큰 효용이 있다. 그토록 사랑했던 연인인데 한 때 열정적이었다는 사실 말고는 아무 감정상의 파장이 일지 않는다. 또 철저히 버렸던 연인에게 배신자가 다시 달려가 안기는 일도 발생한다. 고전물리학에서 양자물리학으로의 진화가 “사랑”을 다루는 관점에 잘 들어맞게 된다. “사랑”은 다양한 내러티브로 구성되는 결맞음 현상이며 상태 함수에 따라 급격히 붕괴되는 하나의 파동이다. 

   마른 남자는 살찐 여자를 옆 서커스단에 팔아먹고 흥행을 올리기 위해 우주인의 역할을 하는 ‘화성에서 온 대사’를 사들인다. 그로 인해 잠시 서커스단의 수입이 올라간다. 그러나 예상치 못하게 ‘화성에서 온 대사’의 인기가 좋아지자 그가 마른 남자의 일을 도맡게 된다. 서커스 단원들은 ‘화성에서 온 대사’를 중심으로 뭉치고 마른 남자는 옆 서커스단으로 팔려나가게 된다. 살찐 여자가 있는 바로 그곳으로 말이다.      



마른 남자, 온몸을 떨며 눈물을 펑펑 쏟으며, 여기 그가 온다... 살찐 숙녀의 텐트 속으로 돌진한다! 모든 서커스 사람들, 찾아온 관객들, 동물들이 뒤따라 달려간다. 씩씩거리며, 소리를 질러대며, 눈앞이 아뜩하도록 웃어젖힌다. 와락! 그녀 품으로! 그리고 그녀는 열정적으로 용서하듯이 요동치는 가슴에 그를 꼭 끌어안는다. 관객들은 기쁨에 겨워 눈물을 흘리고! 이 모든 이미지들이 하나를 이룬다(203).     



사랑이 변질되는 상태 함수가 있다면 사랑이 역 방향으로 진행되는 상태 함수도 있다. 이때의 상황은 물론 처음 사랑의 복원이 아니다. 새로운 국면이다. 시간이 개입되기 때문이다. 마른 남자는 옆 서커스 단원으로 일을 해야 하기에 살찐 여자에게 화해를 청할 수밖에 없다. 권력을 거머쥔 단장이 아닌 또 다른 서커스단에 종속된 단원이 된 것이다. 그 둘은 쌍을 이루어 다시 마르고 살찐 역할에 복종한다. 사랑 때문에 상징을 거부하는 반역 따위는 절대 꿈꾸지 않으면서.           



“삶 속에서는 이런 모든 것에 익숙해져야 해.”...... 그러므로, 적잖이 희생이 따르더라도, 정말 거역할 수 없는 것이라면, 갈림길 속에서 순결한 아픔에 복종하고 우리의 귀중한 은유를 빨리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203).               



이제 마른 남자와 살찐 여자는 새로운 서커스단에 자신들의 작은 공간을 마련하고 매우 마르거나 매우 살찌는 것을 잘 유지하며 전형적인 서커스 단원으로 살아간다. 그들은 자신들의 상징에 복종하는 대신 밤 동안 서커스 단장이 장부에 푹 빠져 있을 때 잠시나마  자유로울 수 있었다. 로버트 쿠버는 순결한 아픔에 복종하는 이런 삶만이 바로 우리 인간에게 부과된 확실한 선고라고 강조한다. 그들은 사랑에 빠지고, 사랑을 유지하려 노력을 하고, 배반도 하고, 화해도 했지만 결국 남은 것은 마른 남자와 살찐 여자라는 상징을 입고 서커스를 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진실 밖에 없다. 사랑을 과학적 담론처럼 진화와 연관시켜 분석해 보아도 그 포착할 수 없는 부조리함은 해결되지 않는 잔여로 남는다. 우리 모두는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에 의해 삶을 지배당하고, 물리학적인 환경과 시간의 잠식에 의해 최초의 감정까지 잃고 마는 마른 남자와 살찐 숙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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