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테호른, 그 정상을 꼭 봐야만 했다

내가 놓친 아름다운 것들에 대하여

by 월급쟁이 노마드

스위스 철도청(SBB)에서 가을 프로모션을 하면서 2인 스위스패스 1일권 가격을 78프랑에 내놓았다. 반액 카드(Half Fair Travelcard)가 있는 사람들이 대상이었고, 우리는 이미 카드를 가지고 있어서 이 혜택을 누리기로 했다.


(*반액카드는 연 190프랑을 내면 스위스 내 모든 기차, 버스, 산악열차, 곤돌라 일부가 반값이다. 생각보다 금방 본전을 찾을 수 있다. 3개월 이상 머문다면 추천!)


마침 금토일 연휴가 있어 배우자와 어딜갈까 한참을 생각하다 늘 가고 싶었던 마테호른을 가기로 했다. 8년간 노트북 배경화면이었는데, 이제는 실제로 보고싶었다. 사실 내가 스위스에 오기 전까지 내 배경화면이 마테호른인 것도 몰랐다. 업무하느라, 박사 논문쓰느라 몇년을 내내 가지고 다녔지만 배경화면엔 관심을 둘 시간도 없었고, 마음의 여유도 없었다. 그러다 문득 스위스에서 다시 노트북을 켰는데 그게 마침 마테호른이었던 것이다.

노트북 배경화면, 마테호른


마테호른이 있는 체르마트는 작은 마을이라 2박 3일이면 충분할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리 날씨가 안좋은 가을이라지만 2박 3일 내에 마테호른 정상은 한번쯤 보겠지라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Visp에서 경유하여 산악열차를 타고 체르마트로 갔다. 30분정도 타자 벌써부터 눈으로 덮힌 산들이 보였고, 만년설의 푸르른 빛도 볼 수 있었다. 기대가 점점 고조되었다. 높은 봉우리가 보이기만 하면 저게 마테호른일까? 구글 지도를 켜보기 바빴다. 1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체르마트에 도착했고, 숙소를 찾으러 가는길에 드디어 그 웅장한 마테호른을 마주했다.


3대가 덕을 쌓아야 마테호른의 정상을 볼 수 있다는데, 덕이 부족하였는지 꼭대기가 아쉽게도 살짝 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테호른은 거대하고 웅장했다. 구름이 걷힐듯 말듯 꼭대기에 걸쳐 있었다.


호텔에 짐만 맡긴 후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 가기 위해 나왔다. 스위스패스를 가진 사람에게도 싼 가격은 아니었다. 반값 할인을 받아 2인에 132프랑이었으니 기차에 20만원을 넘게 쓴 셈이다. 멋진 풍경을 보려면 꼭 오른쪽에 앉아야 한다는 많은 한국 블로거들의 말을 듣고 싶었으나 우리는 자리가 없어 왼쪽에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치는 아름다웠고, 여전히 마테호른의 꼭대기엔 구름이 걸쳐 있었다.


고르너그라트 전망대에 오르니 더 날씨가 흐려졌다. 주변의 빙하와 산맥들이 눈부시게 아름다웠지만 내 마음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여기까지 와서 저 마테호른 정상을 못보다니 너무 아쉬웠다.


그리고 문제는 그 다음날, 수네가 5대 호수 트레킹을 하기 위해 나섰는데 시작할 때부터 마테호른 절반이나 구름에 갇혀있었다. 트레킹 길이 아름답고, 호수가 빛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마음을 감출수가 없었다. 하지만 같이 간 배우자에게도 그렇고, 나 자신에게도 '오히려 마테호른 정상이 안보이니까 다른 아름다운 곳들을 관찰할 수 있어 좋아'라고 말하며 이런 아쉬운 상황을 이겨내기 위해, 그리고 좀 더 성숙한 인간처럼 보이기 위해 노력을 했으나, 여전히 나는 마테호른 정상을 보고 싶었다.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아 마테호른, 제발 정상을 한번 보여주세요. 그럼 제가 그만 집착하고 있는 그대로를 즐길게요.' 이틀 내내 아쉬운 마음이 떠나질 않았다.


마지막날, 조식을 먹고 스파를 하러 갔다가 아무래도 이번 여행에선 안되겠다 싶어서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체크아웃을 하고, Ricola(스위스 사탕회사)에서 운영하는 작은 야생화 정원이 있다고 하여 30분 정도 트레킹을 했다. 그리고 마침내...거기서 마테호른의 정상을 봤다. 드디어 보았다. 보지 않았으면 아쉬웠을만큼 마테호른의 완전체는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간밤에 눈까지 내려 더 아름다운 하얀 삼각형이었다.


마음이 놓이는 기분이었다. 마테호른의 아름다움도 좋았지만 내가 드디어 그 정상을 봤다는 기분이 좋았다. 등반가들 용어중에 'summit fever'라는게 있다. 어떻게든 정상에 올라야 한다는 강박에 사로잡혀 합리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는 것인데, 이로 인해 많은 등반가들이 목숨을 잃곤 한다.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욕망으로 인해 판단력을 상실할때 쓰는 용어기도 하다. 그 등반가들의 심정을 나는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아, 나는 대체 왜 마테호른의 정상에 그렇게 집착한 것일까. 2박 3일 내가 여행에 쓴 시간과 돈 때문일까, 스위스에 사는 나는 이번에 못보면 다음에 또 볼 수 있었을텐데 왜 그랬을까. 직장인의 마인드로 일하듯 여행해서 그런걸까? 내 목표는 마테호른을 완전체로 보는 것이고, 그걸 달성해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직장인의 마음이었던것 아닐까.


아쉬우면 아쉬운대로 넘어갈 수 있는 성숙한 마음은 언제쯤 가질 수 있는 것일까. 공부하듯, 일하듯 그렇게 정상에 집착하지 않아도 우리네 인생엔 아름다운게 많을텐데 말이다. 나는 분명 마테호른 꼭대기를 몇번이나 뒤돌아 보느라 다른 아름다운 풍경을 놓쳤을 것이다.


늘 잘하고 싶다는 마음, 최고가 되고 싶다는 마음, 세운 목표를 이루고 싶다는 마음, 이런 마음들을 여행할 때 만큼은 조금 내려놓아야 할텐데 마음처럼 쉽지가 않다. 최고가 아닌것들에도 눈길을 주고, 그들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직장인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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