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한 잿빛 겨울을 이겨내는 방법
프랑스에 이어 스위스에 살게 되면서 처음엔 사람들이 크리스마스를 너무 유난스럽게 챙긴다고 생각했다. 물론 종교적인 의미도 크지만 이렇게 까지 호들갑을 떨 일인가 라는 생각이었다.
11월부터 마트에는 크리스마스 용품이 나오기 시작하고 집 베란다와 창문에도 알록달록 장식을 달기 시작한다. 그리고 11월 중순부터는 각 도시마다 크리스마스 마켓을 연다. (한국인 입장에서) 아주 솔직히 말하면 살 건 많지 않다. 다른 곳에서도 다 파는 물건이고 가격도 일반 매장보다 살짝 더 비싸기도 하다. 근데 왜 유럽은 크리스마스에 열광하는 것일까.
나는 우울한 잿빛 가을을 한 달 넘게 지내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았다. 유럽의 가을 비는 한국의 장마와는 결이 다르다. 일단 우중충하다. 한국의 장마도 우중충한 건 맞지만 가끔씩 밝은 햇살을 보여주기도 하고 기온도 높아서 후텁지근하다. 근데 유럽의 가을은 을씨년스럽다. 한국보다 구름이 더 두꺼운 겹으로 형성된 것 같다. 구름층을 뚫고 나가면 해가 있을 것이라고 상상조차 되지 않는 회색빛이다. 기온도 낮아서 한기가 스며드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튼 알 수 없는 우울감이 추적추적 내리는 비처럼 스며든다.
한국에서도 우울한 적은 있지만 그 우울감은 가벼운 감기처럼 지나갔다. 하지만 유럽 가을의 우울감은 독하게도 낫지 않는 감기 같다. 그리고 서머타임이 해제되면서 해가 일찍 진다. 5시만 되면 깜깜한 밤이 되니 가뜩이나 해도 없는데 어두운 밤이 더욱 길어진다. 비도 오고, 춥고, 밤도 길다.
대체 이 가을과 겨울을 어떻게 헤쳐나가야 할지 앞이 막막하다. 스위스는 특히 외식물가가 비싸다. 그래서 기분 낸다고 매일 외식을 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래서 그들은 반짝이는 것들로 마음을 달래기로 한 것 같다.
트리를 사고, 매년 몇 개씩 모아 온 오너먼트들을 트리에 달고, 알록달록한 귀여운 장식들을 꺼내고, 정성껏 크리스마스를 준비한다. 반짝이는 것들을 보면 마음도 밝아진다. 그리고 귀여운 것들은 언제나 옳은 법이다. 무해하지 않은가.
주말이면 나도 배우자와 시내 상점에 가서 귀여운 크리스마스 소품들을 사고, 여행지에서 마주친 크리스마스 마켓에서 뱅쇼와 라끌렛을 사서 먹어본다. 다소 비싼 가격이지만 괜찮다. 돈으로 그 즐거움과 반짝거림도 살 수 있다면 얼마든 지불할 수 있을 것 같다.
스위스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크리스마스 마켓은 발 디딜 틈도 없이 붐빈다. 특히 퐁듀 샌드위치(바게트 속을 파서 그 안에 퐁듀를 듬뿍 넣어주는 샌드위치)를 파는 곳은 수십 명이 줄을 선다. 한국에만 웨이팅 문화가 있는 줄 알았더니 유럽도 다 사람 사는 곳이었다.
그리고 쌀쌀해진 겨울 날씨에 머그잔에 담아 마시는 뱅쇼는 마음의 한기도 녹여주는 듯하다. 사람들을 구경하는 재미도 있다. 평소에는 8시만 넘어도 주택가 인도에 사람이 없는데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한 장소에 모여있다니 더욱 흥겨워진다.
매주 주말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에도 가끔 배우자와 크리스마스 마켓을 간다. 우리가 살고 있는 도시는 체코의 프라하나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만큼 유명한 크리스마스 마켓은 없지만 그래도 즐길거리가 많고, 맛난 음식들이 많다. 심지어 한국의 핫도그도 팔 정도니 규모가 꽤 있고, 다양한 국적의 음식들이 많은 편이다. 기분 탓인지 모르겠지만 크리스마스 마켓들을 다니면서 나의 우울감도 조금 나아진 것 같다.
반짝이고 알록달록한 것들은 정말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든다. 크리스마스가 없었다고 해도 유럽에서는 다른 축제를 만들어서라도 이 우중충한 가을과 겨울을 이겨내려고 했을 것이다. 요란스럽다고 생각했던 크리스마스 문화를 이제 조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반짝임이 필요했던 것이었다. 이 유럽의 을씨년스러운 날씨를 이겨내기 위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12월의 어느 날) 하루 종일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그래도 창문에 달린 산타들과 빨간 오너먼트들이 있어서 조금은 집안에 활기가 돈다. 내일은 저녁에 퐁듀를 먹으면서 빨간색 초를 켜볼 생각이다. 나도 이 크리스마스를 요란하게 즐겨봐야겠다. 그리고 주말엔 다른 도시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들러서 그 지역의 뱅쇼와 라끌렛을 맛봐야지!
왠지 크리스마스 시즌이 끝나버리면 마음이 허전해질 것 같다. 끝나기 전에 이 알록달록한 시즌을 잘 즐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