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을 벗어난 영혼, 여러 자아의 ‘탄생’(3)
그날 남편은 실험사고로 목숨을 잃을 뻔했다. 연구실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을 때, 모든 것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심장 모니터의 기계음이 점점 느려지며, 불규칙하게 뛰던 그 신호는 마침내 완전히 멈췄다. 그의 심장박동이 멈추고, 병실은 일순간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간호사들이 허둥지둥 움직이며, 그 주위를 둘러싸고 의사들이 심장충격기를 준비했다. 날카로운 전기 소리가 퍼지며, 그의 몸이 순간적으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러나, 내 남편은 돌아오지 않았다. 의사가 차분하면서도 무겁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시간은… 오후 7시 2분, 사망 확인됐습니다." 다른 의사와 간호사들이 묵묵히 장비를 정리했다.
의료진들은 하얀 천을 씌우고, 나에게 마지막 시간을 주려는 듯 조용히 응급실을 나갔다. 나는 속에서 울컥 올라오는 감정들을 참지 못하고, 그의 손을 꽉 잡은 채 속삭였다.
“재동… 여기서 이렇게 끝난다는 게 믿기지 않아. 세상이 끝난다면, 그곳에서 다시 만나겠지. 하지만… 당신을 너무 많이 사랑해.”
계속 울먹거리며, 그에게 사랑한다고 주절주절 속삭였다. 그러더니, 그 기계에서 다시 신호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한 박자, 두 박자.
심장은 다시 뛰었고, 하얀 천을 걷어낸 남편이 내 손을 꽉 쥐더니, 말했다.
"이레나, 이제 모든 걸 알겠어. 사람은 여러 자아가 있어."
"당신은 이미 그 자아들을 통제할 수 있지 않아?"
나는 죽다 살아난 사람의 어딘가 동떨어진 질문에, 그저 의식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얼떨결에 "어어…. 그런 것 같아"라고 대답했다. 그날 이후로 남편의 말투와 분위기는 확연히 달라졌다. 그리고 시시때때로 "Egotum!"이라 외친다.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단어를.
인간의 운명이 그 스펙트럼에서 결정된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 스펙트럼 속에서 인간은 자신의 운명과 자아를 끊임없이 오가고 조정한다며.
그리고 사후세계에서 내가 아직 거기로 오면 안 된다고 했었지? 라나 뭐라나, 세상을 모두 꿰뚫어 본 도인처럼 말한다. 도무지 깎지 않은 머리카락과 자신만이 모든 것을 깨달았다는 듯한 그 깊은 눈빛을 간직한 채.
‘맞다, 그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가면이라 부르기도 하고, 때로는 기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남편의 말처럼 우리는 어느 부모에게서 태어나는지, 어느 나라에서 자라는지, 나아가 어느 행성에서 삶을 시작하는지에 따라 삶의 방향이 정해진다. 이는 인간만의 특권이 아닌, 우주 섭리에 속한 모든 존재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의식이 형성되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그 경로를 벗어날 수 없다. 남편은 종종 "인간"이라는 단어로 이를 국한했지만, 내 생각은 다르다. 우리가 만나는 반려견, 식물, 지구상의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도 이 법칙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들도 우리처럼 운명의 궤도 안에 있으며, 그 경로에서 각자의 소임을 수행할 뿐이다. 기어코, 모든 생명은 서로를 연결하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톱니처럼, 그 흐름 속에서 의미와 자리를 찾아간다.
서울의 마지막 밤은 으레 차분했다. 김연수 교수님과 안상국 교수님을 찾아뵈어, 연구를 마무리하고 핀란드로 돌아간다는 소식을 전했다. 두 분은 아쉬움 속에서도 우리의 결정을 존중하며 따뜻한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김 교수님은 눈빛으로 무언가 더 말하려 했지만, 그저 고개를 끄덕였고. 안 교수님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다음으로 무하와 판승, 그리고 엘레나를 따로 만났다. 무하는 여전히 유쾌한 농담으로 나의 귀국을 가볍게 받아들였지만, 눈빛 속의 아쉬움은 숨길 수 없었다. 판승은 무뚝뚝하게 작별을 고했지만, 그가 흘린 짧은 한숨에서 긴 시간을 함께한 동료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엘레나는 눈물을 참으며 나에게 따뜻한 포옹을 건넸다. "핀란드에 가서도 일기 계속 써, 너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아. Baby" 엘레나의 목소리는 작았지만, 그 말은 오랫동안 나의 가슴에 남을 것 같았다.
보라와의 작별 인사는 나에게 그 어떤 순간보다도 깊고 진했다. 대학 생활 동안 서로를 가장 많이 이해해주었던 그녀.
서로의 마음을 나누고, 꿈을 이야기하고, 때로는 끝없는 밤을 지새우며 속마음을 털어놓았던 그녀였다. 공항으로 향하기 전, 우리는 무거운 침묵으로 서로를 바라봤다. 입을 먼저 뗀 것은 보라였다.
"이레나, 네가 없으면 여기가 조금 외로울 것 같아." 그 말 한마디에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보라와의 생활이 없었다면, 한국에서 보냈던 시간이 이토록 따뜻하지 않았음을 잘 알고 있었다.
"나도, 보라. 넌 내 한국 생활의 전부였어."
보라는 순간적으로 미소를 지었지만, 그 미소 속에는 수많은 감정이 얽혀 있었다. 그리고 짧은 숨을 내쉬며 나를 꼭 안았다. "다시 돌아와, 너와 함께 보낸 이 시간을 잊지 않을 거야. 너도 잊지 마."
나는 말없이, 그녀를 더 꽉 안아주었다. 고개를 들어 보라의 얼굴을 보았다. "네가 있어서, 여기서 내가 정말 행복했어. 정말 고마워." 보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눈물을 감추려 고개를 살짝 돌렸다. 시부모님께 인사를 드릴 때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따뜻하게 품어주었다. 나는 그들의 기대에 고마움을 느끼며, 짧지만 깊은 인사를 남겼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밤거리를 걸으며, 무스토는 나를 따라 한 발 한 발 천천히 거닐었다. 그의 콧등에 차가운 공기가 스며들자, 잠시 멈춰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며, 무스토가 이 순간을 기억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도 어쩌면 이 도시를 그리워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천공항에 도착한 순간, 복잡한 감정에 빠져든다. 공항의 거대한 창문을 통해 보이는 비행기, 사람들로 북적이는 탑승 데스크. 한동안 그 풍경을 바라보았다. 무스토는 내 곁에서 여전히 꼬리를 좌우로 흔들며, 낯선 환경이 불안한지 안아달라고 낑낑거린다. 탑승 절차를 마치고, 게이트로 걸어가면서, 이 모든 장면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처럼 다가왔다. 탑승 직전, 무스토는 나의 발치에 코를 갖다 대었다. 그런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우리, 핀란드에 가자."
한국에서의 대장정이 끝을 맺었다. 나는 김연수 교수와 함께 쓴 논문으로 나름의 명성을 얻었고, 그로 인해 핀란드의 헬싱키 대학교(University of Helsinki)에서 교수직 제안을 받았다. 핀란드에서 가장 오래된 명문 대학으로, 학문과 연구의 중심지다. 아, 물론, 재동이도 함께 간다. 이 새로운 출발에 함께할 남편이 없다면, 그곳은 텅 빈 무대에 불과하니.
그는 박사 후 연구를 중단하고, 백수의 신분으로 나를 따라가기로 했다. 그와 내가 하나가 되는 것,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필연적이다.
비행기 안에서 보내는 13시간 동안, 남편과 나란히 앉아 그동안 한국에서 보냈던 이야기꽃을 피웠다. 무스토는 발밑의 커다란 켄넬 안에서 조금 불편한 듯 몸을 뒤척였지만, 곧 조용히 숨을 고르며 잠들었다. 남편은 이내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너무 착하네, 무스토. 비행기 안에서 이렇게 얌전할 줄이야.”
“하하, 가끔 짖을까 봐. 나도 걱정했어.”
그렇게 우리는 기내식으로 제공된 음식을 함께 먹고, 서로의 손을 잡으며 핀란드로 향했다. 남편은 주로 기내 화면에서 영화를 보다가도, 중간중간 나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지금 뭐 보고 있어?” 내가 물었다.
“예전부터 보고 싶었던 다큐멘터리.”
핀란드에 가까워질수록 창밖에 펼쳐진 구름과 하늘의 풍경은 조금씩 변해갔다. 마침내, 공항에 도착하자, 문이 열리며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새소리, 멀리서 울리는 자동차의 조용한 엔진 소리, 그 모든 것이 내가 다시 핀란드에 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내 고향.’ 차갑고 푸른 하늘 아래 펼쳐진 광활한 숲, 넓은 도로와 함께 서 있는 작은 주택들, 그 사이로 보이는 호수.
“엄마, 공항에 오지 마. 그냥 집에서 기다려. 택시 타고 갈게.”
도심을 벗어나면서 점점 더 익숙한 풍경이 짙어졌다. 마침내 집에 도착하자, 엄마와 아빠가 문 앞에 나와 우리를 반겨주었다. “어서 와라!” 엄마의 목소리는 여전히 따뜻했지만, 얼굴은 세월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주름진 얼굴과 약간 휜 허리, 그리고 손에 든 작은 찻잔이 무거워 보일 정도로 제법 나이가 들었다. 집으로 들어가면서 되뇌었다. “내 운명은 한국에서 시작되었고, 그곳에서 남편과 무스토를 만났다. 그리고 필연적으로 다시 핀란드로 돌아올 운명이었다.”
엄마는 우리를 살피며, 따뜻한 차를 내주셨다. “집이 참 조용했는데, 오랜만에 너희들이 와서 좋다.” 나는 그 말에 살며시 미소 지으며, 한국에서 보낸 모든 시간은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다고 생각했다.
우연과 필연은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서로 마주치며, 때로는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한국에서 시작된 새로운 삶, 핀란드로 돌아오는 이 순간까지, 모든 사건과 만남은 단순한 우연의 나열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고향에 돌아와 남편과 무스토, 부모님과 함께하는 순간, 나는 이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는 확신을 얻는다. 우연은 무작위적인 사건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질서와 의미가 숨어 있다. 한국에서의 대학 생활, 무하, 판승, 엘레나, 보라와의 만남, 김연수 교수님과의 연구는 표면적으로는 우연이다. 그러나, 나를 지금의 나로 만들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었다. 그 과정에서 만난 남편과의 사랑은 너무나 당연하고.
우리는 늘 우연을 바라보며, 그 안에 숨겨진 필연을 찾는다. 필연이란 우리를 이끌어주는 궤도와 같다. 수많은 우연이라는 별들의 무작위 궤적 속에서, 결국 우리는 그 궤도를 따라 걸을 수밖에 없다. 그 궤도는 자유로워 보이지만, 어느새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은밀히 가리키고 있으니. 마치 밤하늘의 북극성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