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과 ‘필연’
내 딸이 핀란드로 돌아왔다. 사람들은 나를 보며 미쳤다고 한다. 시선을 피하거나, 손사래를 치기도 하고, 심지어 삿대질까지 한다. 그들의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모양이다. 딸과 사위가 이렇게 나와 함께 살고 있는데, 왜들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다. 우리 딸은 오늘도 나의 옆에 있다. 여기, 내 곁에서 함께 숨 쉬고 있지 않은가.
이레나가 좋아하는 요리인 카렐리안 파이(Karjalanpiirakka)를 준비했다. 오늘은 특별한 날이니까.
만들던 중, 무스토가 주방 쪽을 어슬렁거리며 꼬리를 흔들었다. 오늘은 바로 이레나가 교수로 임용되는 날이다. 주방에서 기웃거리는 무스토의 귀에 속삭였다. “무스토야, 엄마 깨워야지. 얼른 가서 깨워, 오늘만큼은 지각하면 안 되잖니.”
사랑스러운 딸을 깨우는 일은 언제나 내게 큰 기쁨이었다. 그녀가 깊은 잠에 빠져있을 때, 그 맑은 얼굴을 바라보면 세상이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 다가왔다. 오늘도 나는 같은 마음으로 딸의 방으로 다가갔다.
“이레나! 이레나! 오늘 중요한 날이잖니.”
대답이 없다. 창문 사이로 아침 햇살이 그녀의 방을 밝히고 있지만, 그저 조용히 누워있나 보다.
나는 다시 한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이레나…."
폭우가 쏟아졌던 날, 시계는 오후 7시 2분을 가리켰다. 하늘은 검푸르게 물들어가는 중이었고, 굵은 빗방울들이 흙과 물을 강하게 때리며, 폭포처럼 쏟아졌다. 거세진 빗줄기는 지형을 순식간에 무너뜨리기 시작했고, 그 속에서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한순간 땅이 유실되기 시작되자, 흙은 나를 무심하게 삼켜버렸다. 그리고 급격히 무너지는 흙더미는 물과 만나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가속된 물의 흐름은 나를 깊은 곳으로 이끌었고, 중력과 압력에 의해 점점 앞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잠식시켰다.
물은 냉혹하고, 흙은 무정했다.
나의 영혼은 그 순간 육체를 떠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이 혼돈 속에서 스러졌고, 이 세상에서 나의 흔적은 물결에 의해 지워졌다. 그렇다. 나는 이미 영적인 존재였다.
그 이후, 엄마는 대학 시절 나의 일기들을 꺼내 읽었다. 그리고 그녀는 아빠와 실제 경험했던 일과 자신의 상상력을 덧붙여 나를 다시 불러냈다. 나는 엄마의 문장 속에서 존재를 이어갔고, 그녀의 상상 속에서 살아있었다. 나는 죽음으로 향할 운명이었고, 엄마는 나를 되돌릴 수 없을 운명이었다.
모든 것은 그날, 오후 7시 2분, 물과 흙 속에서 끝이 났다.
사람들은 단 하나뿐인 딸을 잃은 엄마에게 미치광이라 말하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하지만 아니다. 그건 그들이 보지 못하는 것,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시뮬레이션에 살고 있다. ‘나’라는 존재, 혹은 더 정확히 말해 ‘자아’라는 것은 허상에 가깝다. 허영 속에서 만들어진 가상의 나. 그 속에서 자신을 정의하며 살아간다.
아직도 내 남편은 그날 밤의 강을 자주 찾는다. 내가 떠난 그 물결 속에서, 끝나지 않은 무언가를 찾으려는 듯. 한 번도 손에 대지 않았던 담배를 피우며, 차가운 공기 속에서 희미한 목소리로 “Egotum”이라 외친다. 그 작은 단어, 그 하나의 문장에서 그의 모든 감정을 엿볼 수 있다. 새로운 인생을 시작할 용기가 없는지, 그곳에서 하염없이 나를 기다릴 뿐이다. 하지만, 그것도 그의 운명이다.
결정론적 시각으로 보면 세상을 지나치게 회의적으로 보는 것 같지만, 지금의 나, 이 영혼 속에서 바라보는 남편은 내게 머물러 있다. 간단히 말해서, 내 영혼의 자아는 그를 그렇게 바라본다. 다른 기록에 따르면, 그는 다른 여자를 만나고, 다시 사랑에 빠지며, 새로운 삶을 시작한다. 그가 나를 얼마나 사랑해줬는지 알기에, 어떤 ‘자아’이든 나는 그를 여전히 사랑한다. 하지만, 엄마는 나와는 다르게 그를 충격 속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 같다. 그가 삶의 의지를 잃고, 머리도 다듬지 않으며, 도를 닦은 사람처럼 지내는 모습이 안쓰러워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속임수 거울"을 탄생시켰다.
엄마와 아빠의 딸이었던 것은 변치 않은 사실이다. 내 남편이 나와 함께했던 시간도, 그 사랑도, 현실에서 분명히 존재했던 진실이다.
하지만, 그 뒤에 엄마의 기록으로 쓰인 나는, 엄마의 시뮬레이션대로 어딘가에서 그렇게 살고 있다.
나 또한 누군가의 시뮬레이션으로 이 세계에서만 죽음을 맞이했을 뿐, 원자 상태로 엄마와 아빠 그리고 남편을 지켜볼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필연이었고, 그 필연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자리를 찾는다.
주지 스님의 말, 아니, 엄마가 남긴 기록 속의 “오온이 공하다”라는 문장은 더 깊은 의미를 품고 있다. 나의 상상에 따라 빈칸 [ ]을 아무렇게나 채울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나는 [어떠어떠한 사람]이 되고 싶다.’라고 말하거나, 명함을 만들어 지니거나 등등 그것을 계속 의식하면, 그려낸 꿈이 실현되기도 한다. 그것에 집중하게끔 모든 의식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망상 속으로만 갇힐 때도 있으며, 그 상상했던 무언가가 실제 이루어지더라도 그걸 끌어당겼던 상황, 그 순간마저도 필연 속에서 일어난 사건일 뿐이다. 그러므로 끌어당김의 법칙은 일부 오류를 지닌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끌어당긴다고 믿는 순간마저도, 그 믿음은 이미 그 운명의 일부로 짜여 있었다는 말이다.
결국 '오온이 공하다'라는 말의 본질은 내가 무엇을 상상하든, 내가 무엇을 믿든, 그 모든 것이 실제로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빈 상태라는 의미였다. 거울 저편의 스펙트럼 속에서 내가 보지 못한, 아직 인식하지 못한 세계가 그저 고요하게 존재할 뿐, 그 안에 무엇을 채우려는 시도는 무의미하다. 우리는 그저 그 흐름 속에서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다시 사라지는 존재일 뿐이니까.
영적인 존재가 된 나는 ‘무(無)’에 가깝다. 그리고 가끔 엄마의 기록 속에서 살아가는 또 다른 나를 마주하기도 한다. 이처럼 현세에 있는 사람들도 여러 자아를 품는다. 그리고 스스로 의식하지 않은 상태로 돌입하면, 어떤 삶도 마주 가능하다. 부자가 될 수 있으며, 한 시대를 풍미하는 거장이 될 수도 있다. 그것도 또 누군가의 기록 속에서 살아가는 시뮬레이션이다. 선택한다는 것마저도 ‘공’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지로 무언가를 선택한다고 믿지만, 실상 그 모든 것은 이미 예정된 궤적 안에서 흘러가고 있을 뿐이다. 자유의지란 환상일 뿐이다. 우리는 자연의 한 부분으로써, 우주적 파동과 원자의 데이터로 존재할 뿐, 어떤 것도 선택할 수 없다. 육신을 가진 여러분도, 지금 이 순간의 나도.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할 필요도, 집착할 이유도 없다.
낙엽이 중력에 의해 천천히 땅으로 떨어지듯, 우리 또한 자연 속 일부다. 태초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흐름, 여러 은하가 생기고, 지구가 생기고, 바다가 생기고, 미생물이 생기고, 그 흐름 속에 인간도 존재한다. 그리고 그러한 요소들은 특정한 물리 법칙 아래 끊임없이 운동하며 상호작용하고 있다.
그럼 인간의 생각과 자아는 어떤가?
그저 뇌 속의 입자 운동에 불과하다. 다시 말해, 물리 법칙의 지배를 받는다는 말이다. 그러니, 오늘은 ‘햄버거를 먹을까, 치킨을 먹을까’라며, 고민하는 것도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는 것’, ‘나뭇잎이 떨어지는 것’과 같이 하나의 자연현상으로 해석된다.
‘나뭇잎이 떨어진다’라는 현상에 자유라는 개념이 있는가? 그리고 그 현상을 결정하는 주체가 있는가?
우리의 뇌와 신체 그리고 모든 생물은 그저 광활한 우주 속에서, 스스로 자유롭다고 착각하게끔 정교하게 설계된 원자 덩어리다. 그러므로 ‘나’라고 생각하는 자아와 의식은 허영에 불과하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도 무언가를 하는 것이고, 무언가를 하는 것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다. 그 자연은 창조주의 손길에 의해 그렇게 설계됐다.
그래서 나는 결론을 내렸다. ‘나’라는 것은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다는 결론을. 그저 그렇게 ‘있는’ 것일 뿐, 아무것도 아니다. 허상도 진실도 모두 그저 ‘공’이었다. 세상은 단지, 그런 것이었다.
- Irena Leikanto - [이레나 뢰이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