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신을 벗어난 영혼, 여러 자아의 ‘탄생’(2)
아침부터 관악산 등산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한여름의 해가 지지 않는 긴 오후. 노을이 붉게 하늘을 물들이는 시간이었지만, 어둠은 멀리 물러서 있었다. 그때였다. 하늘 한가운데에 갑자기 커다란 무지개가 떠올랐다. 오후 7시가 다 되어가도, 그 무지개는 여러 가지 색으로 빛났다. “저것 봐. 아름답다. 무지개가 몇 가지 색인지 알아?” 조수석에 있던 아내가 물었다.
"음…. 빨주노초파남보? 일곱 가지잖아."
그러자 아내는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나라에선 그렇게 보지 않아요. 미국은 남색을 제외한 여섯 개, 음…. 멕시코는 검정, 하양, 빨강, 노랑, 파랑. 심지어 아프리카 사람들은 두세 가지 색깔로 이루어졌다고 말해. 저 스펙트럼 사이에는 무언가가 더 있어. 뭔가 우리가 보지 못하는, 그 경계 너머에 있는 것들.”
뒤이어 아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만약 내가 불치병에 걸려서, 원자로 남아있다면, 당신은 슬퍼할 거야?"
“당연하지. 그건 너무나도 슬플 거야.”
그 말을 들은 아내는 깊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당신도 어쩔 수 없는 운명이군.”
아내는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그리고 그 경계를 넘나드는 우리의 인식에 대해 말했던 것 같다. 무지개의 색이 경계에서 모호해지는 것처럼, 아내는 이 경계를 넘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Egotum". 그날 이후로 우리의 대화를 이렇게 불렀다. Ego와 Fate, 자아와 운명이 뒤엉켜 탄생한 이 단어는 경계에 서 있는 존재가 지녀야 할 자세를 상징한다. 우리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의 중간, 그사이에 존재하는 나약함과 동시에 강인함을 담아내는 단어였다. 그 무지개의 경계에서, 아내가 내게 전하고자 한 메시지는 그 경계에 서 있는 우리가 삶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를 말해주려는 듯했다.
박사 후 연구원이 된 지 7일 하고 2시간째, 실험 중 예기치 못한 사고가 발생했다. 그날, 대규모 모형실험을 준비 중이었다. 물리적 법칙과 데이터를 결합해 가설을 증명하는 중요한 연구였다. 거대한 실험 장비와 데이터가 얽히고설킨 환경에서 전기 회로의 오작동이 발생했다. 그리고 불길한 소리가 나더니, 짧은 전류가 급속도로 흐르기 시작했다. 섬뜩한 전조를 느끼기도 전에 폭발음이 터져 나왔고, 공기는 뜨겁게 뒤틀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피하려 했지만, 전류가 피부에 닿는 순간, 마비된 듯한 고통에 휩싸였고 시야가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며, 전신은 바닥으로 ‘쿵!’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무거운 어둠 속에서, 의식은 천천히 멀어져 갔다. 천장의 조명은 불규칙하게 깜빡였고, 기계의 전류가 튀어 오르는 소리만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때 안상국 교수님은 연구실의 두꺼운 유리창 너머로 그 전율하는 파장을 느꼈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됐다'라는 감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면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문을 박차고 연구실 안으로 달려왔다. 나는 이미 쓰러져 있었고, 몸을 가로놓은 주변에서 전류가 은밀히 흐르고 있었다.
"재동!" 교수님은 핸드폰을 꺼내고 119에 전화를 걸었다. "조금만 기다려." 그는 다급한 음성으로 말하며, 나의 의식을 붙잡기 위해 계속 말을 걸어왔다. 그렇게, 구급대원들이 도착할 때까지 긴박한 상황은 계속되었다. 구급대 안에서는 심장충격기를 준비하고, 응급처치가 시작됐다. 간호사들은 침착하게 몸 상태를 점검하고, 대원들은 "1, 2, 3!" 외치며 충격파를 가했다. 그동안 내 영혼은 육신을 떠나, 이 모든 상황을 지켜봤다. 공중에서 내 몸을 내려다보며, ‘내가…. 내가…. 죽은 건가?’
육신은 생명 없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곧, 내 영혼은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려 천천히 공중을 떠나, 어딘가 더 먼 곳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곧, 그 흐름에 사로잡혀 사후세계라는 심연 속에서 더 깊은 진리를 찾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곳에서 ‘속임수 거울’을 마주할 수 있었다.
그 거울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안에 있던 존재는 다름 아닌 ‘내 아내 이레나’였다. 사후세계의 거울 속에서 영혼의 변형을 겪고 있던 그녀는 점점 더 이질적인 존재로 변하며, 자아도 복잡하게 얽혀 갔다. 그리고 형체는 안개처럼 부유하며, 윤곽이 흐릿해졌다가, 뚜렷해지기를 반복했다. 뒤이어, 익숙하면서도 낯선 얼굴들이 겹쳐졌고, 수없이 많은 아내의 얼굴이 나를 향해 속삭였다. 하지만, 그 속삭임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그 순간 모든 것을 깨달았다. "Egotum"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내의 변신은 단지 육체적 변화가 아닌, 자아의 다중성을 의미했다. 그 뜻은 인간은 모두 하나의 자아가 아닌, 여러 자아의 교차 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을 이해했고, 바로 이 세상이 하나의 거대 시뮬레이션임을 인식했다. "이곳이 바로 Ego와 Fate가 교차하는 지점인 건가!" 내 영혼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 교차점에서 우리의 운명은 결정된다고.
거울 속의 아내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레나… 이레나! 왜 여기 있어? 이제 같이 가자!" 목소리는 공허한 공간을 가르고 사라졌다. 거울 속 여러 명의 아내가 고개를 전부 돌리더니, 차갑고도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아직 여기 올 때가 아니야.”
나는 그 선고에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모든 것이 흐릿하게 멀어지면서 의식이 다시 멍해졌다. 사후세계에서 현실로 돌아오면서, 갑작스럽게 들려오는 모니터링 기계음이 귀를 찢었고, 수치는 빠르게 변동했다. 그리고 하얀 천으로 덮여 있던 내 육신은 서서히 생명을 되찾았다. 눈을 뜨자마자, 하얀 천을 손으로 내리니, 옆에는 아내가 내 몸에 엎드려 있었다. 그녀는 또 다른 내 손을 꽉 잡고 있었고, 눈물로 범벅된 얼굴이 흐릿한 시야 속에서 점점 선명해졌다. 아내의 눈물 자국은 그녀가 얼마나 절박하게 울었는지, 얼마나 내가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랐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눈 속에는 두려움과 기쁨이 복잡하게 얽혀 있기도 했다. 죽은 줄만 알았던 내가 눈앞에서 깨어났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나는 그녀의 떨리는 손을 천천히 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레나, 이제 모든 걸 알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