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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노트 Aug 29. 2023

여름의 끝자락, 가을의 첫 날밤


정확히 삼일 전, 금요일 밤부터였어요.


어라? 날씨가 제법 시원한데!  오늘 밤엔 에어컨 안 틀어도 되겠는걸~. 유난히 더에 약한, 마음이 불타오르는 중2  딸아이는 밤마다 아우성이었습니다. 제발 에어컨 좀 틀자고. 작년 에어컨 고장으로 생짜 베기로 여름을 견디게 한 것이 미안해 올해는 잠은 좀 시원하게 자게 해주자고 마음을 먹었었지요. 주로 저녁 무렵에야 아이들이 돌아오니, 오는 시간에 맞춰 집을 시원하게 해 놓았습니다. 


그렇게 저녁마다 열대야와 간혹 장마와 태풍으로 창문을 열지 못할 때에도 우리 집 실외기는 바삐 돌아갔습니다. 그러다 갑자기 금요일 저녁, 제법 오후부터 바람이 선선하더니, 저녁 공기에서 가을의 인기척을 느꼈습니다. 풀벌레 울음소리가 확실히 더 크고 깊어졌더라고요.


사실 여름의 더위를 온전히 느껴본 적은 아마 20대 이후로 올해가 처음인 듯싶습니다. 사무실에 출근하면 가끔 나가는 외근을 제외하고 하루 종일 사무실에 있으니, 출퇴근 시간의 더위만 견디면 되었으니까요. 그러다 올해는 7월 말 더운 베트남 여행을 시작으로 8월엔 우리나라의 찐 여름까지 더위를 온전히 겪었습니다.  


그러자 여름에 왜 매미가 그렇게 울어댔는지 알 것도 같았습니다.  사람들이 덥다고 밤낮으로 아우성을 치니 여름은 그 소리가 버거워 매미 소리로 맞대응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계절은 자신의 본분을 다하고 있는데, 사람들이 하도 뭐라고 하니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계절의 소리를 내는 것이지요. 그래도 명색이 가장 긴 계절의 여왕인데, 자동차 소음 따위로 대응할 순 없잖아요? ^^ 


그래~ 맘껏 울어라~ 얼마 안남았다 !!


약 보름을 집에서 지내며 초복부터 말복까지 여름의 절정을 온몸으로 맞이했습니다. 틈틈이 도서관으로 피서를 가기도 하고, 미뤄뒀던 건강검진과 가고 싶었던 카페도 가며 평소 하고 싶었던 소박한 나의 버킷리스트를 도장 깨기 했습니다. 


사실 저는 여름을 가장 두려워합니다. 더위로 인해 생기는 아주 사소한 불편함 때문이지요. 음식에는 귀신같이 초파리가 꼬이고, 어디 외출이라도 할라치면 선크림 정도는 발라야 하는데, 바르기 전부터 땀이 나니 이건 선크림을 바르는 건지, 흐르는 땀을 다시 얼굴에 펴 바르는 건지, 아무튼 수시로 발생하는 이런 상황들이 싫고 불편했습니다. 


그렇게 달력만 바라보며 어서 입추와 말복만 지나가길 기다렸는데, 막상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하니 시원섭섭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더위가 물러가면서 행복했던 여름날이 이제 추억으로 불릴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지요.


생각해 보니 참 많은 선물을 남겨준 것 같습니다. 아들과 축구를 보러 가고, 글 지기 친구들과 전자책 출간회를 가졌고, 가족들과 첫 해외여행, 브런치 작가, 여기저기 고장 난 내 몸을 위한 종합검진, 듣고 싶었던 강의를 찾아 듣고, 도서관에서 보냈던 여유로운 나날들.. 그때는 하루하루 쳐내야 하는 숙제처럼 느껴졌는데, 지나고 보니 내 인생 최고의 선물을 주고 여름이 떠나가고 있는 걸 알겠습니다.  






아침마다 쨍하던 매미 소리를 매일 알아차리고, 여름 저녁노을이 얼마나 예쁜지를 바라볼 수 있게 해준 이 계절은, 이어령 선생님의 '모든 것은 선물이었다'라는 말씀처럼, 잔치가 끝나가는 여름의 끝자락에서야 알겠습니다. 


선선한 바람을 몰고 온 가을 뒤에는, 올해도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아쉬움도 있다는걸, 여름이 우리가 마음껏 여유를 부릴 수 있는 마음의 마지노선이었다는 것도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지난 금요일 밤부터 가을이라고 혼자 정했습니다. 이렇게 고마운 여름을 흐지부지 얼렁뚱땅 보내고 싶지 않아 감사에 대한 정산이 필요했거든요. 올해는 운 좋게 여름과 가을이 바뀌는 그 순간을 알아차릴 수 있어 얼마나 다행스럽고 고마운지 모릅니다. 





여름이 가을에게 저를 좀 잘 인계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성격이 급해서 불평이 많긴 하지만 그래도 정도 많고 얘기해 보면 재미있는 아줌마라고 잘 좀 봐줬으면 합니다.


8월 말 여름의 끝자락에서야 나의 행복했던 지난 여름날을 돌아보게 됩니다. 땅바닥을 뚫을 듯  내리쬐던 햇볕도, 아침잠을 깨우던 매미 소리도 이제 일 년 후를 기약해야겠지요. 내년에 또 더위가 찾아오면 불평을 하겠지만 올해 여름에겐 감사함을 표현하며 가을을 맞이하고 싶습니다.   


여름아, 가을을 부탁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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