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7. 3. 10. 수요일, 벚꽃이 개화한 날
오전 10시, 인문학 도서관에서 나의 첫 글쓰기 수업이 있었다. 간밤에 너무 떨려 잠을 설쳤더니 아침부터 머리가 몽롱했지만, 창문 너머 벚꽃이 꽃망울을 터트린 걸 보고, 좋은 기운이라 생각했다. 인문학 도서관은 우리 동네 도서관으로 내가 10여 년 전부터 주말이나 쉬는 날에 자주 가던 곳이다. 처음 이곳에 인문학 도서관이 개관한다고 했을 때 얼마나 설레던지. 늘 가던 그 길이 오늘따라 낯설게 느껴지는 건, 나의 의지가 아니라 누군가 나를 필요로 했다는데 그 차이가 있는 것 같다.
처음에 나의 책이 출간되고 도서관 여기저기에 비치되자, 몇몇 곳에서 연락이 왔다. 하루 글쓰기 특강이나 몇 회차의 수업을 문의하였는데, 나는 늘 내가 읽고 썼던 이곳에서 제일 먼저 시작하고 싶었다. 층마다 새겨져 있는 나의 흔적을 되뇌어가며 좀 더 흥미롭고 생동감 넘치는 나의 경험담도 전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의 장소는 4층, 디지털컴퓨터실 내의 조그마한 스터디방으로, 많아야 10여 명이 앉을 수 있는데 다행히 8명이 참석 예정이라 조금 여유로워 다행이었다. 늦게 도착해 미리 앉아 있는 수강생들에게 어색하게 인사하는 것보다, 내가 먼저 자리를 잡고 그들을 맞이해주고 싶었다. 그래야 자연스러움에 대한 우위도 차지하고, 예의도 갖추는 거라 생각했다.
30분 먼저 도착하니 다행히 아무도 없었고, 긴장을 풀며 강의 내용을 보고 있을 때, 40대 중반으로 보이는 수강생이 내 눈치를 보며 불쑥 들어왔다. 드디어 시작이구나. 최대한 어색하지 않게 입꼬리를 올려 반갑게 인사하고 이런저런 얘기도 나눴다. 예전 디지털 튜터 강의 때, 이렇게 미리 수업 전 라포를 형성하는 게 중요하다고 했었다.
사실 소수 인원으로 편안하게 생각을 나누면 되는 거라 별로 긴장될 것도 없었다. 다만, 나보다 한수 위 고수들이 와서는, '글쓰기 강의라고 아침부터 서둘러 왔는데, 뭔 시답잖은 소리나 하고 있지?'라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까 그게 걱정되었다.
10시가 가까이 오자 감사하게도 8명 모두 참석하였다. 나이대는 30대 중반부터 60대 후반까지 다양해 보였고 여자 6명, 남자 2명이었다. 대부분 이 근방에 사시는 분들로 퇴직 후 이곳을 매일 출근하다시피 한다는 분, 아이들 제 앞가림 하니 이제 뭐라도 시작하고 싶었다는 분, 친구들이 요즘 뭘 계속 배우러 다니길래 자기도 따라왔다는 분 등 사연도 제각각이었지만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이분들이 결국은 쓰게 될 거라는걸. 할 것과 볼 것이 넘쳐 나고, 웬만한 건 로봇이 알아서 해주니 머리 쓰고 손을 움직이는 일은 웬만한 결심으론 하기 힘들다. 그것도 한 번도 아닌 8번이나 되는 아침 강의를 듣기 위해 제 몸을 추슬러 데리고 와서 앉히는 일은 자신의 의지가 명확해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그런 면을 높이 평가도 하고, 쓰는 의욕을 북돋워주기 위해 앞으로 이름 뒤에 '작가님'이라고 부르겠다고 말씀드렸더니 싫지 않은 눈치였다. 예전에 어색하면서도 슬쩍 미소를 품었던 나처럼. 물론, 이곳저곳 무료 배움터에서 조금 배우다 쉽게 그만두는 프로스탑러들이 많긴 하지만 이분들 중 한 명이라도 계속 쓰는 분이 나온다면 그걸로 족하다 생각했다.
수업은 간단한 자기소개를 시작으로, '나는 왜 쓰고 싶은가'에 대해 각자 적어보게 했다. 자신이 그동안 살아온 세월을 찬찬히 돌이켜보며 어떤 계기가 있었기에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됐는지, 나지막한 대금 연주음악을 틀어 주며 한번 집중해서 적어 보게 했다. 마치 이럴 줄 알았건 것처럼, 술술 써 내려가는 분이 있는가 하면, 제목만 달랑 적어 놓고 애꿎은 볼펜만 만지작거리는 분도 계셨지만, 미간의 주름과 깨무는 입술을 보니, 다들 고민하여 적는 중임은 다르지 않았다.
잔잔한 대금 소리를 배경으로 글씨를 써 내려가는 소리, 종이의 바스락거림, 가끔 들리는 짧은 한숨 등, 창밖을 꽉 채우고 있는 장산의 모습과 햇살을 느끼며 그 순간, 나는 꿈을 꾸는 듯했다. 내가 쓰기로 누구를 가르친다니, 이분들이 정말 내 얘기를 들으러 이 귀한 아침에 오셨단 생각에, 8주 내내 행복한 글쓰기가 되도록 내 안의 것을 다 쏟아붓고 싶은 열정이 피어 올라왔다.
30여 분의 시간이 흐르고 우리는 각자 자기가 쓴 글을 낭독하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 만난 사람들 앞에서 나의 속 이야기를 들려주는 게 어색할 수도 있지만, 나의 경험을 비추어보면 전혀 모르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러 편한 적도 있었다. 몇 해 전 퇴직을 하고, 별일 없으면 도서관을 매일 온다는 60대 중반의 남자분은, 복도 게시판에 글쓰기 무료 강좌를 보고 시간 때우기 좋을 것 같아 신청했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고, 40대 초등학생을 둔 주부는, 아이와 도서관에 왔다가 우연히 이 강의를 보고, 학창 시절 글 좀 쓴다고 칭찬받았던 일이 떠올라 신청했다고 했다. 나름 그동안 써온 일기장도 몇 권 있어 쓰기 자체에 대한 어색함은 없지만, 남이 읽을 수도 있는 글을 쓴 적은 없다며 수줍게 고백했다. 마흔 초반이지만 30대로 보이는 그녀의 푸른 생기와 젊음이 순간 부러웠다.
쉰 살을 목전에 두고 쓰기를 시작한 나와는 달리 지금부터 글을 꾸준히 쓴다면 이 분의 인생이 어떻게 풍만해질지 알기에 더욱 그러했다. 그때, 50대인 나와 연배가 비슷한 수강생 한 분이 내게 물었다. 선생님은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냐고, 언제부터 쓰기 시작했냐고. 오랜만에 내가 늘 공식처럼 말하던 새벽 기상 얘기며, 미사시 10분 글쓰기, 꿈글전자책쓰기 등 내가 계속 써 오고 책을 내고 강의까지 할 수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새로운 꿈을 좀 더 자유롭게 확장시키기 위해 25년 근무해 온 곳을 올해 초 그만둔 사실도.
수강생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나의 이야기를 이해한 듯 보였지만,
아마 속으로는 ' 이 일로 돈벌이가 되나? 아이들도 한창 돈 들어갈 나인데, 모아 준 돈이 좀 있겠지.. 하며 나를 근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을지도 모른다. 물론 나도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서는 일을 계속해야 했지만, 나의 마음은 늘 불안정했다. 그리고 결정적인 계기는, 내가 나중에 아파서 드러눕기라도 하면, 내가 제일 아쉬워할 일이 무얼까 생각해 봤더니, 돈 때문에 가 하고 싶은 일을 계속 미뤘던 것이었다. 경제적으로는 조금 더 풍족해졌을지 몰라도, 나의 귀한 시간과 꿈, 건강을 담보로 더는 외면하고 싶지 않았다.
90분간의 글쓰기 첫 수업이 끝나고, 나는 간단한 소감을 물었다. 오랜만에 쓰는 거라 어색했지만 싫진 않았다. 나에 대해 생각을 조금 더 해봐야겠다 등 쓰기를 시작하는 누구나 처음 겪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음 주에 쓸 주제를 미리 말해주고 그렇게 첫 수업을 끝내고 나니, 수업이 결정되고 오늘까지 한 달 내내 정체되어 있던 부담감이 쑥 내려가 집까지 뛰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가뿐했졌다. 사람들이 돌아가고 뒷정리를 마친 나는, 도서관 담당자에게 인사하고 밖을 나오니, 정오가 다 된 3월의 한낮은 적당히 시원하고 따뜻했다.
집으로 걸어가면 20여 분, 걷는 길에 내가 좋아하는 분식집에 들려 점심을 먹고 갈까 아님 곧장 돌아가 라면을 끓일까 하는 행복한 고민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점심을 먹고 거실 소파에서 잠시 눈을 부친 후 글을 썼다. 진도가 잘나가지 않아 책을 좀 보다가 오전에 못 간 동네 헬스장을 찾아 땀을 흠뻑 흘리니 하루를 새로 얻은 듯 가뿐하였다. 집으로 돌아와 내가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 ‘세상의 모든 음악’에 주파수를 맞추고 저녁 준비를 하며,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건가 하는 생각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힘들었지만 계속 쓰면서 내게 일어났던 기적이 결코 우연이 아니었음을 다음 번 강의 때 꼭 얘기해 주고 싶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