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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무노트 Sep 24. 2023

오늘부터 우리 사귀는 거다!

저는 결혼을 삼십 대 중반에 하고, 이듬해부터 연년생을 차례로 낳았습니다. 그 아이들이 이제 중2, 중1이 되었지요. 한 살 차이인데도 누나는 의젓하고, 둘째 녀석은 아직 초등학생 티를 벗지 못했습니다. 둘째는 어릴 때부터 애교가 많아 제발 천천히 자라길 바랐지만, 벌써 중학생이 되었고, 다행히 아직 본격적인 사춘기는 오지 않아 가끔 애교를 부려주어 고맙기만 합니다. 


키는 이제 160을 겨우 넘겼고, 마른 체구에 운동을 정말 좋아하는데요, 얼마 전 교내 축구 대회에서 골을 꽤 넣어 조금 유명해졌다고 누나가 일러주더군요.



밥보다 군것질을 좋아하고 월요일마다 오는 아파트 장터에서,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4천 원짜리 회오리 감자가 다 팔릴까 봐 노심초사하는 아이입니다. 용케 손에 쥔 날은 개선장군처럼 얼마나 당당하게 돌아오는지.. 사실 제가 한 입 먹어보니 감자가 두툼하고 아이들이 좋아하는 시즈닝 가루가 많아 인기가 없을 수가 없겠더라고요. 주말엔 친구들과 온 동네 가용한 운동장을 찾고다니며 축구하고 노는 아이라 옷은 운동복이 대부분이었는데요, 특히 남자아이들은 무채색 옷에 평상복이 운동복이고 운동복이 생활복이잖아요? ^^


그렇게 옷 투정 없이 잘 입던 아이가 언제부턴가 입을 옷이 없다며 옷장 서랍을 열고는 투덜거리기 시작했습니다. 어릴 때부터 한 살 위 사촌 형에게 주로 옷을 받아 입었는데, 언니는 외동아들이라고 주로 메이커 옷을 사 입힌 덕에 몇 년을 잘 받아 입혔지요.



얼마 전에도 옷을 몇 벌 받아 아이에게 입혀 보며 옷장에 넣어 정리하려는데, 


"엄마! 요즘, 누가 이런 옷을 입어?"


"나 안 입을래!  나 옷 없어, 옷 좀 사줘요!"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멀쩡한 옷을 두고 안 입겠다고 떼를 쓰는 아이에게 이 옷이 뭐가 어떻냐, 이쁘기만 하다며 설득했지만 옷 상태가 문제가 아니라, 요즘 아이들이 입는 옷 스타일이 아니라는 겁니다. 이런 거 입고 다니면 왕따 당한다나요.. 

아무래도 말이 안 통해, 항상 식구들 평가에 냉정할 정도로 객관적인 우리 큰 딸내미에게 물어봤지요.


"00아, 이 옷 어때? 00이가 이 옷이 촌스럽다고 안 입는다는데 이게 그렇게 촌스러워?"


".........,   응! .. 요즘 저런 거 안 입지!"


일부러 동생 편을 들어줄 리가 없는 누나이기에 거짓말은 아닌 듯했습니다. 저는 겨우 달래서 그것들 중 몇 개만 옷장에 넣고 나머지는 다시 나눔을 하였는데요, 당장 입을 옷이 없다며 조만간 옷을 사러 가기로 약속을 했지요. 




그렇게 약속한 날이 오늘이었고, 사람 붐비기 전 얼른 갔다 오자며, 오픈 시간에 맞추어 아들과 오랜만에 단둘이 가을 나들이를 했습니다. 선선한 가을바람에 아들과 단둘이 걸으니 얼마나 좋던지요. 

동네 친구들이 보면 부끄럽다고 언젠가부터 손도 잡지 않던 아이가, 제 손을 먼저 잡더라고요~ 저는 웬일이냐 싶어, 얼른 냉큼 맞잡았지요. 저보다 조금 더 자란 아들이 쑥 더 크기 전에 이렇게 친구처럼 나란히 많이 걸어봐야겠단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다 갑자기 장난이 하고 싶어져, 아들을 그윽하게 바라보며,


"우리 이제 손잡았으니, 오늘부터 사귀는 거다!"


하며 씨익 웃었더니,  아들은 정색을 하며 손을 빼더니 앞으로 내달렸습니다. 전 이에 질세라,  멀어지는 아이 뒤통수에 대고, 


"오늘부터 1일이야~~!"를 외쳤지요.


아들은 더 속도를 냈고, 길마저 꺾여 더 이상 모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재밌던지 혼자 웃음보가 터져 남이 보면 가을바람에 실성한 여자처럼 깔깔거리며 뒤쫓아갔지요. 다행히 아들은 저 멀리서 저를 흘겨보며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겨우 가까이 다가가서는, 다시 손을 잡으며,


"혼자 가는 게 어딨어?  사귀기로 해놓고!" 하며 또 한 번 농담을 했더니,


"엄마, 한 번만 더 얘기하면 진짜 같이 안 갈 거예요" 하며 질색을 하는 겁니다.


저는 그 모습이 너무 귀여워 더 질척대고 싶었지만 혹시나 진짜 안 간다고 할까 봐 거기서 장난을 멈췄습니다. 버스에 올라타고 마침 뒤에 2인용 자리에 나란히 앉아 가을 나들이를 시작했지요. 습관처럼 핸드폰을 하려는 아들에게,  흔들리는 버스 안에서 멀미 난다며 폰을 반강제로 건네받고는, 


"00아, 저기 창밖에 가을 하늘 좀 봐, 오늘 하늘 너무 이쁘지? 이런 날 일 년 중 며칠 안되니 열심히 봐둬라~, 바람도 시원하고 좋네!"


하고 말하니, 시큰둥하여 보는 둥 마는 둥 했습니다. 차만 타면 잘 자는 아이라 옆에 바짝 붙어앉아 떨어질 고개를 받치려 어깨를 미리 준비했지요. 역시나 5분쯤 지났을까, 제 어깨 위로 아들의 머리가 살포시 얹혔고, 아직 남아 있는 아들 이마의 솜털이 바람에 흔들렸습니다.




중학생이 된 후로, 그렇게 잘 해 주던 볼 뽀뽀도 안 해주고, 한번 해 달고 애원하면, '한 번에 천 원!'이라며 튕구던 녀석이 제 어깨 위에 곯아떨어진걸 보니 아직 영판 어린애입니다. 곧 변성기가 오고 엄마를 더 멀리하겠지요? 어른이 되는 과정이고 독립을 준비하는 인간의 생활사?라고 말하면 덜 서운해지려나요?


덜컹거리는 버스에서 가을을 달리니 천국이 따로 없었습니다. 차를 운전하고 가면 온통 운전에 집중하느라 이런 기회가 없었는데, 오늘 조금 불편하긴 해도 30여 분의 버스 가을 나들이가 너무 설레고 좋습니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아들의 쌔근거리는 숨소리를 듣고 있자니 아기 때의 모습도 떠오르며, 언제 이렇게 컸나 하는 생각에 깊어질 가을이 벌써 서글퍼지기도 했습니다.


목적지에 도착하고, 아들을 깨우면 뭐라고 또 장난을 칠까 생각하다가  좋은 생각이 떠올랐어요.


"00아, 이 옷은 엄마가 사주는 거니까 너도 뭔가 보답을 해야겠지?  음.... 그래서 엄마가 생각해 봤는데, 만원 당 볼 뽀뽀 한 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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