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컨트리 쇼퍼 Jul 02. 2023

한때는 오렌지족의 로데오거리

<아홉 번째 리스트: 서울 강남구 신사동>

오렌지족
1990년대 X세대의 사회 문제에서 비롯된 신조어로 주로 강남구의 부유층 자녀들이 압구정동 등에 형성하여 기존 세대에 충격을 준 집단을 일컫는 말이다. 최초에는 압구정에 모여들었던 부유층 젊은이들의 문화를 일컬었으나, 이후 사회 전반으로 확장되어 소비적 문화에 열중하는 철부지 성향을 의미하게 되었다. 


그 당시 오렌지족이라고 불리었던 사람들은 젊은 세대들이었고, 

이제는 세월이 많이 흘러서 어느새 20대였던 오렌지족들도 50대의 부모세대로 접어들었다고 한다. 


당시 우리 아빠는 삼십 대 초반이었다. 오렌지족이라고 일컫는 사람들이 모여드는 압구정로데오 속에서 아빠는 수제화 가게의 직원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자연스럽게 압구정 쪽을 갈 때마다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오른다. 

압구정로데오가 잠시 죽었을 때가 있었다. 내 기억으로 10년 전쯤이라고 생각한다. 

그때의 압구정로데오는 확실히 예전 같지 않았고, 상권도 많이 죽어있었다.

그래서 가끔 아빠와 이곳을 지나갈 때마다, 아빠는 말버릇 처럼 했던 말이 있었다. 

"옛날에는 안 이랬는데..." 

 

그래도 나는 이 거리를 지날 때마다, 가게의 상점들을 유심히 들여다본다. 

아빠가 끝날 때쯤에 가게로 향한다. 옆집에 있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콘 하나를 사서 입안 가득 베어문다. 

입 주변에는 아이스크림이 잔뜩 묻어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 이제 이곳에도 트렌드 한 젤라또 가게들이 자리 잡고 있다. 



그 시대의 우리 부모님은 우리처럼 나이가 젊었지만 삶을 즐기지 못했다. 

어린 남매를 키워야 했기 때문에 정말 뼈 빠지게 일했던 기억이 여전히 지금도 오래도록 남아있다. 

내가 여섯 살 때, 우리 아빠는 큰 고모부가 운영하시는 압구정 로데오 가게에서 밤 10시에 일이 끝났었다. 

엄마는 백화점에서 마트캐셔로 밤늦게 까지 일을 해야 해서 어린 남매를 맡겨둘 곳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압구정에 사는 고모네 집에 맡겨지게 되었다. 

아빠가 끝날 때가 되면, 아빠는 피곤한 얼굴로 우리가 사는 일산까지 자동차를 몰았다. 


다시 다음날이 되면, 우리 남매는 어김없이 압구정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시선으로 보았을 때, 압구정은 부자의 동네다. 

사촌 언니, 오빠들이 먹고 있는 모든 것은 외국에서 넘어온 것들이었다.

물 대신, 콜라를 먹었고, 점심에는 피자나 햄버거를 시켜 먹었다. 

여름이 되면, 매미들이 자지러지게 울어대는 그 시절이 생각났다. 


다시 또, 밤 10시가 되면 아빠는 퇴근을 하고, 똑같은 일상이 반복된다. 

우리 부모님은 오로지 우리들을 위해서 그 시간을 버텨낸 것이다.  

서울을 빠져나가기 전, 아빠는 차를 정차하고는 나를 데리고 한강으로 가서 멍하니 앉아있었던 기억이 있다. 철이 없던 나는 아빠가 그저 한강이 좋아서 한강에 자주 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아빠는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시 기운을 차리고 내 손을 잡고 우리 집으로 돌아갔다. 

이제는 나도 성인이 되었다. 그 시절의 부모님의 무게를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부모님은 항상 나를 걱정하신다. 

앞으로 어떻게 살 것인지? 

일은 잘 구할 수 있는지?

나는 여전히 불안하게 삶을 전전해가며 살아간다.

지금도 단기방 하나 구하지 못해서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하지만 이런 선택은 오로지 나의 선택이었다. 

책임을 져야만 한다.  


만약, 삼 개월 후에 한국을 떠나지 않았다면 이런 고생은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서 고생을 자처하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여기서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우리 부모님처럼 아이를 낳고, 아이를 위해서 행복하지도 않은 삶을 살아가며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자신이 없다. 

어쩌면 나는 오렌지족일 수도 있다. 나만의 행복을 위해서 살아가니까. 

 

한때는 한국에서 살기 위해 임대주택 등.. SH, LH 알아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요즘에는 여려가지로 우리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 제도가 꽤 잘 되어있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길을 위해서 어렵고,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이제 힘들고 불안했던, 코로나가 지나고 압구정 로데오는 다시 예전처럼 활력을 찾고 있다. 

많은 젊은이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었고, 새로운 가게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남자친구 또한, 압구정 로데오에는 핫한 가게들이 많다는 이유로 좋아했다. 

특히 미국의 문화와 음식이 비슷한 것이 많다고 했다. 

이제는 이곳은 여러 문화들이 섞여 있는 것 같다. 

처음에 나는 애초에 이쪽에 살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어차피 돈도 되지 않아 고려해보지도 않았다.

그저 나 또한 젊은이들의 한 사람으로 이곳의 문화를 즐기러 왔다. 

하지만 이제 압구정로데오는 젊음의 상징을 넘어서 젊은 사람들이 새로운 문화를 선두 하기 위해 도전하는 곳처럼 여겨졌다. 


정말 해외에 나온 것 같은 생각이 든다. 

이곳이 일본인 것 같지만, 여기는 압구정 로데오 안에 있는 식당이다. 

일본을 가지 않고도, 서울에서 일본을 느낄 수 있는 라멘집이다. 

어렸을 때의 압구정 로데오와는 사뭇 달라졌다고 생각한다. 

이런 것만 보더라도 젊은 사람들이 좋아할 것 같은 감성을 가지고 있다.



도로 하나를 두고, 건너편에는 갤러리아 백화점이 있고, 

신사가로수길 쪽으로 걸어가면 현대백화점도 있다. 

백화점을 보면서, 어릴 때 고모 손을 잡고 장을 보러 갔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성인이 돼서는 와본 기억이 잘 없다. 그저 이곳도 나의 추억의 공간일 뿐이다. 



나는 오히려, 압구정 로데오 쪽보다는 신사가로수길을 더 선호한다. 

어릴 때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무용을 하다가 부상으로 인해서 갑작스럽게 전공을 연극영화과로 전과하게 되었다. 당연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연기 때문에 나는 고등학교 2학년부터 이곳에 있는 연기학원을 다녔다. 

현역에는 아무 대학에도 붙지 않아, 결국에는 재수까지 하게 되었다. 

아침 아홉 시까지 학원으로 와서 밤 열 시가 되어서야 집에 갔다.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학원을 다녔다. 그러다 보니 가로수길은 오히려 나에게 정겹게 느껴진다. 


하지만 코로나가 오고 나서 가로수길도 많은 점포들이 폐업을 했다. 

성수동 편에서도 얘기했지만, 나는 이렇게 많은 점포들이 왜 생겼을까 싶었다. 

물론, 정말 장사가 안 돼서 망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로수길에도 팝업스토어를 위해서 빈 상가를 많이 둔다고 한다. 하지만 이제는 예전과 같지 않은 거리의 활력 때문에 나는 그때의 가로수길을 더 좋아한다. 

10년 전만 해도, 가로수길을 사람들로 붐비었고, 압구정로데오에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는 그렇지 않다. 

동네도 그렇고 사람도 그렇고 시간이 흐르면 변하길 마련인 것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서울의 조선을 찾아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