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시작은 갑작스러운 거야
집순이, 집돌이는 있는데 동네순이, 동네돌이라는 말은 없는 이유가 뭘까? 없다면 만들어야겠다 싶을 정도로 나는 동네에 머무는 시간이 너무 좋다. 집에서 쉬면 체력 게이지가 차오른다는 사람들처럼 나는 다른 곳에 놀러 갔다가도 동네 어딘가에 진입하는 순간 몸이 이완하고 체력이 회복되는 느낌을 받는다. 굉장히 유난스럽다고 할 수 있다.
유난스러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다. 우연히도 나에게는 비슷한 감정을 공유하는 두 명의 친구가 더 있다. 어린 시절 이 동네에 이사 와서 가족과 함께 살고 있는 Q. 그리고 나의 대학동기이며 다른 동네에서 긴 시간 살았으나 취업 후 자취할 곳을 찾아 이 동네로 흘러들어온 Y다.
Y는 브랜드 디자이너다. 하는 일은 브랜딩이다. 브랜딩이 뭐냐 하면 여전히 설명하기 어렵지만 무언가의 본질을 탐구하고 가장 적합하다 보이는 비주얼과 메시지를 찾아서 구체화시키는 일을 하는 것 같다.(맞니?) 세명 중 가장 섬세하고 감성적이며, 명확한 취향을 가졌다. Q가 건네준 아보카도 씨를 키우겠다 할 때부터 수상하더니, 어느 순간 원룸 자취방에 작은 화원을 만들어낸 식집사이기도 하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특징은 역시 Y는 답 없는(노답) 술쟁이라는 것 아닐까. 대학 시절부터 맥주가 좋다며 수제 맥주집에서 알바를 하더니, 어느 순간 내추럴 와인에도 발을 들였다. 이제 건강을 생각해 자제하겠다고 말하면서도 자취방 문 앞에 나열된 술병들을 보면 그냥 노답 술쟁이라고 불러도 될 것 같다.
술의 힘일까, Y는 MBTI로 따지자면 I 성향을 가지고 있음에도 모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우리 중에 가장 즐기는 편이기도 하다. 실제로 Y는 혼술을 즐기며 각종 바 사장님들과 소소한 친분을 쌓아왔다. 저래놓고 I 라니, 역시 인간은 4글자로 정의하기에는 복합적인 존재다.
Q는 테크니컬 디자이너다. 쉽게 설명하면 옷의 핏을 잡는 일을 한다. 매일 쏟아지는 옷을 만지고 수정하는 일을 반복하고 있다. 일을 하면서 옷 생산 과정에서 버려지는 재료가 얼마나 많은지 알게 되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소비를 줄이고 지구에 덜 피해를 주고 살고자 하는 가치관을 가지게 되었다.
Q는 신중하고 현실적이다. 이런 성향 때문에 스스로가 꽤 차가운 성격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지만, 나는 우리 중에 가장 인류애를 가진 사람이라고 말한다. 항상 주변 사람들의 기분과 생각을 궁금해하고 충분히 신경 써주지 못했는지에 대해 검토하기 때문이다.
Q는 정리왕이다. 전체를 살피고 차근 차근히 가이드라인을 잡아 상황을 단순화시켜 나간다. 난장판이었던 내 방의 옷장도 Q의 손에 순식간에 정리된 시스템을 갖출 수 있었다. 그 영향인지 나는 항상 Q의 옷차림과 매무새(?)를 한 번씩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Q에게는 잘 정돈된 사람의 모습이 주는 안정감이 있다.
그리고 J. 나는 IT업계에서 일하는 사무직 직장인이다. 보상도 중요하지만 내 일상도 중요하다는 사장님 기준 오만방자한 사고방식을 가지고도 어찌어찌 잘 살아가고 있다.
성격 급한 것으로는 Y와 Q도 지지 않지만 그중에 가장 급한 것은 아무래도 내가 아닐까. 머리보다 몸을 먼저 움직이는 게 익숙하고 눈에 보이는 일은 바로 해야 마음이 편하다. (나중에 까먹을까 걱정되기 때문이다.) 가장 자주 쓰는 말은 '일찍'이다. 일찍 일어나서, 일찍 움직여서, 일찍.... 아무래도 전생에 잠을 너무 많이 자다 큰일 난 사람이었던 것이 틀림없다.
흘러들어오는 기회들은 무언가 이유가 있다-라는 개똥철학을 가지고 살고 있다. 운이 좋게도 그렇게 시작한 일들은 일상에 큰 즐거움이 되어주었기 때문에 이 생각은 나날이 강해지고 있는 중이다.
코로나 기간 동안 재택러가 되었고 국내로, 해외로 워케이션을 떠나는 방랑 생활을 경험했다. 살듯이 여행하는 삶도 즐거웠지만 익숙함은 신선함과 결이 다른 행복이라는 것을 느꼈다. 익숙한 이 동네가 더욱더 소중해졌다.
이렇게 각자 알아서 살던 우리가 집중적으로 모이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다. 가까운 곳에 커피가 맛있는 카페가 오픈하면서였다.
토요일 오전에 커피로 정신을 깨우자며 시작했던 만남은 매 주말마다 반복됐다. 목적은 단순했다. 맛 좋은 커피를 마시며 느긋한 대화의 시간을 가지는 것.
카페는 번잡한 골목과 조용한 거주지의 경계에 위치해 있었다. 오래된 아파트 담장을 따라 늘어선 골목이라 창문너머로 커다란 나무들을 바라보며 풍경을 즐길 수 있다. 언젠가 재건축이 된다면 사라질 풍경이겠지만 말이다.
그 시간이 너무나 즐거워 오픈시간이 다가오면 카페 앞을 서성거리다 사장님에게 인사를 건넨 일도 여러 번이었다. 자연스럽게 카페 사장님은 우리의 또 다른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날, 사장님이 말했다.
"옆에 세탁소 사장님이 가게 내놓으신데요."
카페가 있는 작은 주택건물 옆에는 오래된 세탁소가 있었다. 세탁소 사장님은 건물주(님)였다. 그 자리가 난다니. 나는 Y와 Q의 표정을 확인했다.
눈동자를 굴리던 Q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Y가 해"
나도 덧붙였다.
"그래 네가 해."
그 말을 듣기도 전에 Y는 이미 생각에 잠겨있었다. 사실 우리는 동네에 아지트 공간을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이미 했었기 때문이다. 마음에 드는 적당한 장소가 없어서 무산되었던 이야기였다.
"너네는 어떤데?"
글쎄. 그건 잘 모르겠는데. 솔직한 나의 생각은 그랬다. 하지만 Q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Q는 당연하다는 듯이 대답했다.
"나 정말 도와줄 수 있지. 일도, 자금도."
그럼 같이 하자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했다. 그 말이 맞았다. 결국 우리는 움직여보기로 했다. 이 물 흐르듯 들어온 적당한 기회를 어떻게 잡아볼까 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