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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추 Jul 03. 2023

아무도 안 원하는 원회

기억 속 이야기 11

대부분의 중년들이 그렇듯 대학 시절 동기들과 자주 연락을 하지는 못한다. 꾸준히 만나고 연락하는 사이가 아닌 다음에야 어떻게 사는지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동기들 중에서 정기적으로 나에게 전화를 하는 친구가 한 명 있다.


그는 아직 미혼이고 계속 글을 쓰고 여전히 술을 마신다. 술을 마시면 생각나는 친구들에게 전화를 한다. 그 상위목록에 내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딱히 새로운 얘기를 하지는 않는다. 지난번 통화에서 했던 이야기를 또 하고, 30년 전 이야기를 또 한다. 학교 다닐 때 선배들이 나만 좋아하고 자신은 좋아하지 않았다고 푸념을 늘어놓는다. 자신이 잘되면 나에게 제일 먼저 한 턱 내겠노라며, 아이들과 먹으라고 치킨세트 쿠폰을 보내주겠다는 말도 매번 한다.


그는 1학년 1학기 과대표였고, 사람을 좋아했고, 술을 좋아했다. 1학년 때부터 동기들은 물론 선배들과 두루 친하게 지냈고 술자리가 있는 곳이라면 빠지지 않았다. 문제는 술을 먹으면 했던 얘기를 반복하고 말이 통하지 않아서 술자리가 계속될수록 선후배들이 그를 피하게 됐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창 시절 그의 별명은 ‘안원해’였다(그의 이름은 원회인데 마지막 한 글자를 바꾼 것이다. 그의 성은 왜 하필 ‘안’이란 말인가).


1학년 2학기 때 내가 자취를 시작하자 그는 내 방에서 살다시피 했다. 그게 미안했던지 입대하면서 자신의 더블데크 카세트플레이어를 나에게 주고 갔다. 그 카세트플레이어 앞면에 송기원 선생의 시 제목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를 패러디해서 ‘그대 뱃살이 터져 소설이 빛날 때’라고 화이트로 써 주었다. 그 카세트플레이어는 내가 입대하면서 한 해 후배에게 주고 갔다가 받았고, 그가 복학했을 때 다시 돌려주려 했지만 내가 소설을 쓸 때 필요할 거라면서 받지 않았다.


그도 나처럼 학창 시절 연애를 하지 못했다. 복학한 후에 그는 열 손가락으로도 부족할 만큼 많은 여자후배들에게 고백을 했다고 한다. 천성이 착하고 술 잘 사주는 그를 많은 여자후배들이 따랐다. 그런 여자후배들이 자신을 좋아한다고 생각한 그는 술을 먹다가 고백을 했다고 하는데, 돌아오는 말이 매번 똑같았다고 한다. “오빠나 선배로는 참 좋은데 남자로는 아닌 것 같아요….” 같은 말을 반복하는 버릇이 있던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수많은 여자후배들에게 같은 말을 들었던 것이다.


졸업하고 나서도 그는 동기들의 연락망을 만들고 정기적인 모임을 추진하는 총무 역할을 자처했다. 가끔 동기들의 술자리가 있을 때면 열일 제쳐두고 달려왔고, 경조사에도 꼭 참석했다. 동기들이 모인 자리에는 항상 그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가 아무도 안 원하는데 꼭 온다며 농담을 해도 진지한 표정으로, 아이 내가 당연히 와야지, 했다.


글로 날고 긴다던 동기들이 소설책 한 권 읽지 않고 지내는 동안에도 꾸준히 글을 써서 시나리오작가로 활동하고 있고, 먹고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연락은커녕 어떻게 지내는지조차 궁금해하지 않는 동기들에게 아직도 연락을 하고, 30년 전의 일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하며 동의를 구하는 그에게, 나는 이제 진심을 느낀다.


그가 거친 세상과 맞설 용기가 없어서 되지도 않는 글쓰기를 고집하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별로 할 일이 없으니 자주 술을 먹고 술기운을 빌려 연락을 한다고 생각했다.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오래전 과거에 사로잡혀 산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누가 뭐라든 같은 일을 계속하는 것도 용기이며, 그는 오래전 나를 대하던 마음 그대로 전화를 하는 것이다. 아는 사람 중에 한 명쯤, 예전 모습 그대로 나를 바라봐주는 게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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