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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영백 Jun 20. 2024

드디어 내 편이 생겼다.(3)

누가 뭐래도 내 편 맞네


수년이 지나 돌이켜 보았다. 졸졸 흐르는 개천물을 노려 보았던 그때, 나는 작지만 내 명의로 된 집이 있었고, 남편의 수입도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방그레 웃기부터 하는 우리 아기는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면서 건강하게 잘 자라고 있었다.

그런데도 결혼을 앞둔 친구의 예비신랑 직업이 뭔지, 회사 동료가 어느 동네로 이사를 가는지를 알게 된 날에는 돌덩이가 가슴을 짓누르는 것 같았다. 나의 삶을 세속의 저울에 올려가며 나를 비참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었다.


불행인 건지 다행인 건지 일하는 엄마로 살다 보니 하루하루 열심히 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첫째가 돌이 지나고 아이가 있는 일상에 겨우 적응이 되어갈 때쯤 청천벽력같이 둘째가 생겼다. 이런 젠장. 이렇게 된 이상 더 열심히 살 수밖에 없다!


할 일을 쥐어줘야 움직였던 남편도 아이 둘이 있는 집에서 6년을 지지고 볶다가 내공이 쌓였다. 하루종일 일하고 늦은 밤 귀가해서 몸이 천근만근 피곤할 텐데도 군말 없이 아이들을 씻긴다. 남편의 기척이 없어 어디서 뭐 하고 있지? 하고 보면 건조기에서 꺼내져 방바닥에 나뒹구는 빨래를 조용히 개키고 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런 것은 아니었다. 자질구레한 집안일이 차고 넘치는 4인 가족. (그 중 2인은 유아...) 종종거리며 움직이다 숨이 턱에 차고 허리가 끊어질 거 같을 때면 '이 인간은 뭐 하는 거지?'라는 생각이 든다. 와중에 편안히 누워 계시는 남편을 보면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감정을 표현하는데 미숙한 나는 불편한 갈등상황을 피하려고 몇 번 참다가 결국 폭발해 버다. 집에서나마 몸도 마음도 평온한 상태이길 원하는 남편은 불시에 화 폭탄을 뒤집어썼으니. 아이들을 키우며 사이가 좋을 수가 없었다.  


아이들이 모두 잠든 시간,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이야기라도 나누면 좋을 텐데. 우리는 서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한 명은 소주병을 기울이고, 한 명은 맥주잔을 들이키며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서로 다른 곳을 보고 있다는 것이 의식될 때면 '이러다 부부 사이가 점점 더 멀어지는 것 아니야?'라는 위기감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남편과 나는 육아라는 전쟁터에서 살아남은 전우애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둘 다 결은 다를지언정 아이 둘과 함께 하는 삶에 전력을 다했다. 나는 앞에서 달리며 빨리 오라고 채근했고 남편은 뒤에서 슬렁슬렁 따라왔다. 그래도 우리 두 사람이 향하는 방향은 같았다.


이제껏 내가 살아온 문법으로 해석한 남편은 어수룩하고 게으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다른 방정식을 대입해 보니 나와 아이들을 위해 하루하루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든든한 가장이라는 답이 나왔다.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의 자리를 지키며 최선을 다해 살고 있다. 그것을 순간부터 서로에게 감사한 마음과 존경심이 생긴다. 그리고 그 마음은 신뢰로 연결된다.

"우리를 위해서 애쓰는 당신이 참 고맙고 참 짠하다."


매사에 무심하고 시큰둥 남편에게 간만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웃자고 얘기한 건데 갑자기 죽자고 달려든다. "너는 그런 소리를 듣고 가만히 있냐?"


아니, 왜 말하는 내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건데? 그건 바로 남편은 내 편이기 때문이다. 내 편이 밖에서 괜한 소리를 듣고 들어오면 화가 난다. 내가 뭐라고 하는 것은 괜찮은데 남이 그러는 것은 참지 못한다.


"너, 진짜 내 편 맞았구나?" 하마터면 모르고 있을 뻔 했다.




남편은 있는 듯 없는 듯 자리하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아이들의 그림 속에서 아빠는 핸드폰을 보며 침대에 누워있는 모습으로 종종 등장한다. 남편이 집에서 분주히 움직이지 않는다는 증거로 그 그림을 종종 이용하긴 하지만, 사실 남편은 나무처럼 가만히, 조용히 있고 싶은 사람이다.



그래서였다. 내가 이 사람을 놓을 수 없었던 이유.


나의 원가족은 내가 꽁꽁 닫아놓은 문을 벌컥벌컥 열어젖혔다. 어느 날은 방문이었고, 어느 날은 내 마음의 문이었다. 활짝 열어젖혀진 문 앞에서 나는 항상 어디론가 숨고 싶었다. 또 언제 그런 일을 겪을지 몰라 집에 있으면 항상 불안했다. 남편은 그런 원가족의 성향과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방 문을 모두 열어놓고 살아도 한 번도 나를 자극한 적이 없는 사람. 항상 그 자리에 서 있는 나무 같은 사람.


아주아주 먼 훗날 남편과 나의 가장 좋았던 시절을 회상하라고 한다면 나는 커다란 나무 그늘 밑에서 쉬고 있는 내 모습을 떠올릴 것이다. 청량한 숲내음이 상쾌하다. 솨아아 솨아아 시원한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의 소리가 귀를 울린다.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평온함을 느낀다. 편안하다. 그저 한없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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